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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명경안 明敬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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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명경안
한자명 明敬安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북 무주(茂朱)
생몰년월일 1852 ~ 미상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문태수 의병부대
관련 사건 후기의병
주요 활동 1909년 문태수 의병부대에서 화약제조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5)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부남면(富南面) 심적리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5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의병에 가담하기 이전에는 목수였다. 농부였던 이용이(李用伊)와 함께 문태수(文泰洙)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전북 용담(龍潭)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문태수는 경남 함양(咸陽)의 출신으로 1907년 한일신협약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무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덕유산을 근거로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2월 약 60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무주주재소를 습격하고 붙잡혔으나 탈출하였다. 전북 장수읍을 점령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3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8월에는 충북 영동·청산·옥천 등지로 이동하여 활동하였고, 11월 이후 무주군을 근거로 금산·영동·옥천·상주·청주·보은 등지에서 활동하다 일본 경찰의 밀정과 격투 끝에 부상을 입고 붙잡혀 대구감옥에서 숨졌다.

이러한 문태수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용이와 함께 1909년 2월 5일 전북 용담에서 문태수 의병부대의 의병장 김상진의 부탁을 받고 화약 3근을 제조하고 총 2정을 수리하여 공급하는 등 의병부대의 화력 지원 활동을 벌였다.

이 일로 이용이와 함께 붙잡혀 1909년 6월 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폭동으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판결문(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1909. 6. 9) [판형1]

 

⋮주운화⋮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 김상기, 「한말 호남의병의 항전과 의병장」, 『인문학연구』 98, 충남대학교, 2015.
  • 판결문(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1909.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