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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지환 金智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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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지환
한자명 金智煥
본 관  
이 명 호 일천(一泉)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定州郡)
생몰년월일 1892. 2. 22 ~ 1972. 4. 9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1919년 서울 만세운동
주요 활동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3)

1892년 2월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갈산면(葛山面) 구흥록리(舊興麓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일천(一泉)이다. 1919년 만세운동 때의 주소지는 경기도 개성군(開城郡) 송도면(松都面) 경정(京町) 199번지였다.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간사이학원(關西學院) 대학신학부(大學神學部)를 졸업하였다. 1919년 2월부터 만세운동을 준비하는데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2월 중순 감리교 목사로 원산(元山) 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정춘수(鄭春洙)로부터 기독교와 천도교가 독립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는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 단체와 학생 조직이 독자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던 만세운동 계획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통합을 이루기위한 모색이 분주히 일어날 무렵이었다. 손병희(孫秉熙)를 대표로 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던 천도교측은 평북 정주에 있던 기독교측 유력 인사 이승훈(李昇薰)과 만나 함께하기로 협의하여 찬성을 얻었다. 이어 학생들도 자신들의 독자적인 계획을 중단하고 합류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최종 결정된 것은 2월 말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각계 대표를 선정하기 위해 비밀리에 모여 뜻을 모았다. 감리교 목사인 오화영(吳華英)은 2월 21일 이승훈과 함태영(咸台永)을 만나 천도교와 합작 문제를 논의했고, 해외에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파견할 인사도 선정하였다. 이어 다음날 개성(開城)으로 가서 친동생인 오상근(吳尙根) 집에 머물면서 개성에 있던 기독교 인사를 만나 서울의 독립운동 준비 상황을 전해 주었다. 오화영의 뜻에 찬성하여 2월 23일에는 오화영을 개성 남부예배당으로 초빙하여 설교를 듣고, 이어 함께할 동지를 규합하였다. 같은 날 저녁에 다시 북부교회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만 모여 오화영으로부터 서울의 독립운동 준비 계획을 전해 들었다.

 

한편 33인의 독립선언과 각 지방의 만세시위 계획 외에도 국외에 우리의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기 위한 문건 전달 책임자도 준비되었다. 일본 도쿄(東京)에 보낼 문서는 천도교측에서 지명한 임규(林圭)와 기독교측의 안세환(安世桓)이 담당하기로 되었고, 파리강화회의와 미국으로 보낼 문건의 책임을 맡아 상하이(上海)의 현순(玄楯)에게 전달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2월 28일 서울로 와서 함태영으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각국 위원들에게 송부할 의견서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청원서의 각 초안과 「독립선언서」를 받아 3월 1일 남대문 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역에서 내려 압록강 철교를 건너 안둥현(安東縣)에서 목사로 있던 김병농(金炳穠)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병농 목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의주로 갔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김병농의 아들 김태규(金泰圭)에게 가지고 온 문서를 중국 우편으로 상하이의 현순에게 보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하지만 3월 3일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경의선 기차를 타고 고양군(高陽郡) 백마역에서 내릴 때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다.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재판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이듬해인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출옥 후 서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했으며, 1930년 1월 광주학생운동에 뜻을 같이한 배화학당 학생들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을 때 교사로서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김지환 조사 내용 보도 기사(『매일신보』 1920. 9. 25) [판형1]

 

⋮이정은⋮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20. 10. 30 ;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제1권, 東京 : 原書房,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2원,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8원, 1972 ; 국회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197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자료집』, 11, 12, 13, 199 1 ; 허동현, 「3·1운동에 미친 민족대표의 역할 재조명-기독교계 대표 오화영과 유여대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2006.
  • 김지환 (정면)
  • 김지환 부고기사
  • 김지환 (측면)
  • 김지환 3.1운동 회고 신문보도기사
  • 김지환 판결문_고등법원_1920-03-22
  • 김지환 판결문_경성지방법원_1920-08-09
  • 김지환_profile
  • 김지환 조사 내용 보도 기사(『매일신보』 1920.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