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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문응국 文應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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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문응국
한자명 文應國
본 관  
이 명  
출신지 황해 안악
생몰년월일 1921. 6. 10 ~ 1996. 4. 21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921년 6월 10일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용순면龍(順面) 유순리(兪順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녔다. 14살 때 중국 텐진(天津)으로 가서 형 문응선(文應善)을 만났다. 돌아가서 공부를 하라는 형의 권유로 귀국하여, 마포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시계과를 다녔다.

1938년 형을 만나기 위해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일본인의 소개로 베이징(北京)·타이위안(太原)을 거쳐 산시성(山西省) 창즈현(長治縣) 로안(潞安)에 도착하여, 돈을 벌기 위해 시계방을 경영하였다. 당시 로안에는 일본군 제36여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군 통역과 일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한인들도 있었다.

로안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으로 초모활동을 전개하던 김천성(金天成)을 만났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무정부주의계열의 청년들이 나월환(羅月煥)을 대장으로 하여 결성한 군사조직으로, 시안(西安)에 거점을 마련하고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지역에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김천성을 도와 일본군 통역관인 이도순李(道淳) 등 한인청년들을 규합하였고, 이병곤(李炳坤)·박춘섭(朴春燮)·정일명(鄭一明)·김형철(金亨澈)을 비롯한 40여 명을 시안으로 보냈다. 이러한 활동이 발각되자, 로안을 빠져나와 1940년 5월 시안에 도착하였다.

시안에서 한국청년훈련반(韓國靑年訓練班)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국청년훈련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초모해 온 한인 청년들을 교육 훈련시키기 위해 설립한 것으로, 중국군 후쭝난(胡宗南)부대의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 내에 특별히 설치되었다. 한청반에서 1년 반에 걸쳐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이 되었다. 1942년 10월 졸업을 앞두고 한국독립당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조경한(趙擎韓)·조시원(趙時元) 등의 인솔로 충칭(重慶)으로 갔다.

1943년 8월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 부대장으로 선발되어 인도 버마전선에 파견되었다. 광복군총사령부는 인도 주둔 영국군총사령부와 인도 버마전선에 광복군 대원들을 파견하는 군사협정을 맺고, 대장 한지성(韓志成)을 포함하여 모두 9명의 대원을 선발하였다. 부대장에 임명되어 대원들과 함께 1943년 8월말 인도 캘커타에 도착하였고, 뉴델리에 있는 영국군 총사령부에서 4개월 동안 영어와 대적방송 등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공작대는 교육을 마친 후 영국군에 분산 배속되었다. 3명은 인도군총사령부와 캘커타 방송국에 남았고, 1944년 1월 한지성의 인솔로 부야크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다시 2개 조로 나뉘어 영국군에 분산 배속되었다. 김상준(金尙俊)·나동규(羅東奎)와 함께 영국군 제201부대에 배속되어 임팔전선으로 향하였다. 제201부대는 티딤Tidim에 사령부를 두고 있던 영국군 제17사단의 예하부대였다.

영국군 제201부대와 함께 제2차 버마 반격작전에 참전하였다. 연합군은 1944년 1월 초부터 제2차 버마반격작전을 전개하였는데, 티딤에 위치하고 있던 영국군 제17사단은 버마 중부지역의 교통 중심지인 만달레이Mandalay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달레이를 향해 남하하던 중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제17사단이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일본군에 포위되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인 1943년 3월 16일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문서와 포로심문을 통해 일본군의 병력배치와 위치 등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영국군에 제공하였다. 제공해 준 정보로 제17사단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영국군 사단장은 직접 찾아와 공로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였고, 중국 신문 『대공보(大公報)』는 ‘구설지공(口舌之功)’이라며 그의 공로를 보도하였다.

1944년 5월부터 제17사단장 고우원(Gown) 소장의 요청에 의해 사단사령부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제17사단은 비센풀을 비롯하여 임팔전선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고, 사단사령부에 복무하면서 적문서번역·포로심문·선전문 작성과 배포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1945년 영국군의 버마반격작전에 참가하였다. 버마반격작전은 임팔전투에서 패퇴한 일본군이 버마로 퇴각하자, 연합군이 버마로 퇴각한 일본군에 대해 총반격을 한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 송철(宋哲)과 함께 영국군 전투부대에 배속되어 해상으로부터 버마의 수도 랑군을 목표로 진격하는 상륙작전에 참전하였다. 1945년 5월 랑군은 탈환되었고, 7월 초 일본군을 버마에서 완전히 패퇴시켰다.

1945년 7월 버마탈환작전이 완료된 후, 광복군 공작대 대원들과 함께 인도 캘커타로 철수하였다. 캘커타에서 새로운 작전의 참가를 위해 대기하던 중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1945년 9월 10일 공작대 전원과 함께 충칭으로 돌아와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일제 패망 후 광복군 확군활동(擴軍活動)에 참여하였다. 확군활동은 중국에 이주해 있던 한인청년들과 일본군으로 징집된 한적사병(韓籍士兵)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활동을 말한다. 광복군에서는 간부들을 중국의 주요 도시에 파견하여, 그곳에 있는 한인 청년들과 한적 사병들을 접수하여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난징(南京)으로 파견되어 확군사업을 벌였다. 1945년 10월 난징 잠편지대(暫編支隊)가 편성되었을 때, 지대장 안춘생(安椿生) 휘하에서 진춘호(陳春浩)·김유철(金裕哲)·신영묵(申榮默) 등과 참모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까지 난징에 있다가 상하이(上海)로 와서, 6월 23일 부산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1947년 육군사관학교 제5기로 졸업하였다. 육군대학 교수부원과 제1사단 부사단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2월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장에 임명되어 석굴암 복원 등에 참여하였다. 1963년 3월 원대 복귀하였다가,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광복회 의전부장, 광복군동지회 부회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인도와 버마전선에서 활동한 인면전구공작대원들 [판형1]

 

⋮한시준⋮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2, 2006 ; 『조선일보』, 1962. 2.18, 1996. 4. 2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 1975 ; 이현희 대담,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 박민영,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3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인도와 버마전선에서 활동한 인면전구공작대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