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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민영구 閔泳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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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민영구
한자명 閔泳玖
본 관 여흥(驪興)
이 명  
출신지 서울
생몰년월일 1909. 7. 21 ~ 1976. 2. 11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광복군, 한국독립당, 주화대표단
관련 사건  
주요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총사령부의 실무요원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3)

1909년 7월 21일 서울 종로구 인의동(仁義洞)에서 독립운동가 민제호(閔濟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교섭 활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민필호(閔弼鎬)가 작은 아버지이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원동중학교(遠東中學校)를 거쳐, 1930년대 초반 만국항해전문학교(萬國航海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선박수송회사인 상해화풍수선회사(上海和豊輸船會社)에서 근무하던 중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강(長江)을 이용한 중국 군대와 군수품 수송 작업을 하다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9년 2월 류저우(柳州)에서 김동수·박영준·김인·지달수 등과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 결성에 참여하였다. 벽보 부착이나 합창과 연극 공연 등을 통한 선전활동을 하며,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항전의식 고취와 한·중 연대의 필요성을 홍보하였다.

1940년에 들어 한국광복군 창건이 본격화되면서, 정식 출범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8월 4일 광복군총사령부가 구성되었다. 총사령은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 부관장은 황학수, 주계장(主計長)은 조경한이 맡았다. 이때 지달수·나태섭·김의한 등과 같이 주계(主計)에 임명되었다.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성립식을 거행한 광복군사령부는 당시 중국군의 전략요충지인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있는 군사특파단과 임무를 교대하고, 향후 광복군의 활동을 지휘할 전방지휘부의 성격을 띤 ‘서안판사처(西安辦事處)’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11월 14일 충칭을 출발한 황학수 총사령대리 이하 광복군총사령부 지휘부는 11월 29일 시안에 도착하여 총사령부 서안판사처를 설치하고, 군사특파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이때 지달수와 경제조 조원에 임명되어 경리 업무를 맡았다. 당시 계급은 광복군 부령(副領)이었다.

1942년 9월 김구 등 충칭 거주 한국독립당 당원들 명의로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워싱턴의 미국인 변호사 존 스태거(John Stagger)에게 보내는 감사편지에 이름을 올렸다. 이해 12월 24일 임시정부 재무부 부원으로 발령되었으며, 1943년 3월 30일 재무부 주계과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3월 15일 김구·이시영 등 한국독립당 지도부 인물들이 속한 제1구 당원이었다.

1943년 8월에는 광복군총사령부 군수처 조달과 과원에 임명되었다. 중국 측의 지원이 절실하고 중요했던 당시 임시정부의 상황과 군수처장이 중국인이었던 점 등을 감안하면, 조달 업무를 맡게 된 것은 역량에 대한 평가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4년 6월 1일 임시정부 생계과장, 12일 주계과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시기 강창제·김의한·안원생·박시창 등과 재중경한인생활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10월 ‘총사령부 잠행(暫行, 임시) 조직조례’ 제정으로 광복군 조직이 개편되자, 참모처 제2과 과원으로 배치되었다. 1945년 2월 임시정부 재무부 경리국장, 광복군총사령부 상교참모(上校參謀)에 임명되었다.

광복군총사령부에서 중국문(中國文)으로 발행하는 선전기관지인 『광복(光復)』에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과 전망에 관한 글을 실었다. 먼저 「싱가포르 군항의 해부(新嘉坡軍港的解剖)」에서, “싱가포르는 동방에서 가장 설비가 잘 갖추어진 난공불락의 군항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이 남진을 기도한 이후 영국은 싱가포르에 대한 방위를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미국도 싱가포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싱가포르 방어는 이전보다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만일 일본이 야심을 실행에 옮기고자 남침을 감행한다면 일본 해군은 반드시 싱가포르 부근의 깊은 바다에 수장되어 영원히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또 「적정(敵情) 연구 : 일본 해군은 어디로 진공하는가?(日本海軍向何處進攻)」에서는 “일본 국내의 경제는 이미 파산의 국면에 접어들었고, 농민과 노동자들은 물자 부족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영국과 전쟁을 벌일 경제적 능력이 있는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또한 일본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미국의 태도이다. 이외에도 일본인이 고려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영국이 대서양과 카리브해 일대 자국 근거지를 미국에 양여하는 경우이다. 가령 미국 해군이 자유롭게 버뮤다와 자메이카 등지의 군항을 이용할 수 있게 되거나, 세계 굴지의 싱가포르 군항의 도크와 병기창을 이용하고, 호주 시드니 군항의 장비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 미국 함대는 일본 함대에 비해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니, 일본은 이 점을 깊이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민주 정치체제와 극권 정치체제(民主政體與極權政體)」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민주주의와 극권주의(전체주의) 양대 진영의 대립으로 전개되고 있는 바, 한쪽은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저항과 분투를 진행하고 있으며, 다른 한쪽은 흉폭한 수단으로 인민들을 노예 다루듯 통치하고 있다. 극권주의 통치자들은 완고하고 흉폭한 자들로 그들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인민의 언론·사상·종교의 자유를 빼앗고, 자신들의 통치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민에 대한 압제를 계속하고 있다. 독일은 전세계를 폭력으로 지배하고 모든 자유를 그들의 십자가에 구속시키려고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는 “전쟁의 결과, 만일 히틀러식의 신질서가 승리하게 되면 수많은 비극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민주정체가 승리하게 되면 전후의 상황은 1939년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 다음 “이번 전쟁은 이전의 전쟁과는 완전히 달리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극권정체 하의 통치자들은 인민생활에 필수적인 식량을 제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복마저 제한하고 있다. 장래에는 아마 인종에 대한 제한도 출현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우려하여 공포와 재난의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계속 앞을 향해 투쟁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글들은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과 외국어 능력을 사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일제 패망 후 광복군과 한인 교민의 안전·보호와 귀국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기구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이 조직되면서, 1945년 10월 31일 총무처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3월 31일 한국독립당 난징구당부(南京區黨部) 위원장 대리직을 맡고 있었다. 이후 한인 교포들의 생활과 귀국 문제 등에 대한 지원 활동을 벌이다가, 1947년 6월 한인 교포 1,000여 명과 함께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부터 조선해안경비대에서 활동하였으며, 해군 인천만기지사령관, 해군본부 항무관, 후방참모부장,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59년 3월 10일 해군사관학교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7월 3일 해군소장으로 예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광복』(한국광복군총사령부, 1941) [판형1]

 

⋮한상도⋮

|참고문헌|

『독립』, 1944. 3. 8 ;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제81호, 1944. 8. 16 ; 『조선일보』, 1959. 3. 11, 1976. 2. 12 ; 『동아일보』, 1961. 7. 4, 1976. 2. 12 ; 추헌수 편, 『자료 한국독립운동』 2, 연세대출판부,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7, 1973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34·45, 2005·2009·2011 ;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 오은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결성과 항일공연예술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8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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