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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권세연 權世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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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권세연
한자명 權世淵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자는 조원(祖源), 호는 담와(澹窩) 혹은 성대(星臺)
출신지 경북 봉화
생몰년월일 1836 ~ 1899. 12. 10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안동의병
관련 사건 전기의병
주요 활동 1896년 1월 20일 안동의진의 창의장에 추대되어 안동부 점령. 1월 28일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안동부에서 패퇴, 2월 25일 안동부 탈환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83), 건국포장(1983), 애국장(1990)
권세연 생가(경북 봉화) [판형2]

1836년경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봉화면(奉化面) 유곡리(酉谷里)에서 아버지 권진하(權鎭夏)와 어머니 의성 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정공(忠定公)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후예이며,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의 주손(胄孫)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조원(祖源)이며, 호는 담와(澹窩) 혹은 성대(星臺)이다.

어려서부터 영매(英邁)하고 재국(才局)이 탁월하였다. 9세 때인 1844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외가에서 자라며 외삼촌 김매수(金邁銖)와 김달수(金達銖)의 가르침과 자형(姊兄)인 안동 법흥(法興)의 이승목(李承穆)으로부터 많은 보살핌을 받았다.

1852년 족숙 기천(杞泉) 권승하(權承夏)와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55년에는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긍암(肯菴) 이돈우(李敦禹), 신암(愼菴) 이만각(李晩慤), 복재(復齋) 강건(姜楗),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등과 함께 사사하였다. 1856년 11월 유치명의 문인 수백 명이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 개최한 강회(講會)와 향음주례(鄕飮酒禮)에 참가하여 강록유사(講錄有司)를 맡아 학문적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1864년에는 29세의 나이로 삼계서원(三溪書院)의 재석(齋席)이 되었으며, 1870년에는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1871년 6월 신미양요(辛未洋擾)에 대한 상소 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흥선대원군 정권의 사액서원 훼철령(毁撤令)에 반대하여 삼계서원에서 스승 권승하와 함께 영남 사림들에게 통문을 발송하였다. 1877년 스승 권연하와 함께 삼계서원의 복설(復設)을 위한 삼계사약(三溪社約)을 주도하여 월유사(月有司)를 맡았으며, 1877년에는 박주종(朴周鍾)을 소두(疏頭)로 서원 복설을 주장하는 영남 유생 1만여 명과 함께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877년 여름 풍기(豐基)로 이사하였다.

1881년 영주(榮州)의 성곡(星谷)으로 이사하여 서당을 열고 경사(經史)를 강론하여 문풍(文風)을 진작시켰다. 남계(楠溪) 안호연(安浩淵), 저초(渚樵) 황조하(黃肇夏), 영휴(永休) 박희수(朴禧壽), 그리고 이덕표(李德杓)·이학소(李學紹) 형제 등과 교유하였다.

1883년 유승조(柳崇祖)의 문묘 배향을 청하는 상소와 충재 권벌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때 남정철(南廷哲)의 천거로 숭릉참봉(崇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고 영주로 돌아왔다. 1893년 봉화 유곡으로 귀향하여 문중 자제들의 교육에 매진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 이후 1895년 삼계서원에서 향음주례를 행하여 외세 침략에 따른 내수외양(內修外攘)의 근본을 강조하였다.

「경상도안동창의대장권세연격(창의격문)」 [판형4]

1895년 11월 27일 단발을 하라는 공문이 안동부에 도착하자 호계서당(虎溪書堂)에서 통문을 돌리며 창의를 모색하였다. 그해 1월 19일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이 밤을 틈타 안동부에서 도망한 뒤, 1월 20일 안동향교에서 열린 향회에서 안동의병의 창의장(倡義將)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인근 백성들에게 의병의 동참을 촉구하는 「경상도안동창의대장권세연격(慶尙道安東倡義大將權世淵檄)」을 발송하였다.

1월 21일부터 안동의병의 지휘부를 편성하였다. 창의대장 이하 부장 곽종석(郭鍾錫), 중군장 유완(柳碗), 선봉장 김옥서(金玉瑞), 우익장 권용현(權用賢), 좌익장 이운호(李運鎬), 좌부장 이선호(李宜鎬) 등을 주축으로 진용을 편성하였다.

1월 24일 예천(醴泉)에 집결한 관군 300여 명과 일본군 100여 명이 1월 25일 용궁(龍宮) 산양(山陽)과 안동 풍산(豐山)을 거쳐 안동으로 진격하여 안동부 탈환을 시도하였다. 1월 26일 관군과 일본군이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봉장 김옥서(金玉瑞)에게 포군 70여 명을 거느리고 예천으로 출병하여 대응토록 하였고, 중군장 유완(柳碗)에게도 40~50명을 거느리고 따르게 하였다. 이어 27일에는 우익장 권용현(權用賢)에게 군정 60명, 28일에는 좌부장 이의호(李宜鎬)에게 100여 명을 거느리고 출병하여 대적토록 하였다. 그러나 1월 29일 안동의병은 안동과 예천의 접경지대 관군과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2월 2일 안동부를 접수한 관찰사 김석중에게 안동의병의 문부(文簿)와 전곡(錢穀)을 압수당하였으며, 주민들은 강제로 단발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안동부에서 물러나 태백산 구마동(九麻洞, 현, 봉화군 소천면(小川面) 고선리(古善里))으로 들어가 재기를 기도하였다.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한 뒤 안동부를 공략하였다. 2월 19일 안동을 빠져나가 서울로 향하던 김석중이 의병장 이강년에게 체포되어 2월 25일 문경 농암 장터에서 처형되었다. 2월 25일 이상룡(李相龍)·유시연(柳時淵) 등과 함께 안동부로 무혈 입성하여 안동향교에 진을 쳤다. 향회를 열고 군자금을 확충하기 위해 각 문중과 향교, 그리고 서원별로 의연금(義捐金)을 배분하였다. 3월 7일 하회(河回)의 유난영(柳蘭榮)을 제군문도총(諸軍門都總)으로 영입하는 등 의병진을 좀 더 전투적인 체제로 개편하였다. 대장 이하 도총 유난영, 부장 김하림(金夏林), 중군 권재호(權載昊) 등이었다. 3월 8일 봉화의병, 3월 10일 호좌의병이 안동으로 들어오자 3월 11일 연무당(鍊武堂)에서 연합하는 의식을 취한 뒤 군사 훈련을 하였다.

3월 12일 의병장에서 사퇴하였다. 「의병재거후의장단자(義兵再擧後義將單子)」에서 “본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어서 지난해에 패배한 일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지금은 군무가 그 모양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공사 간에 있어서 합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백산 구마동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참고문헌|

『觀行堂世稿』, 「星臺先生文集」 ; 李肯淵, 『乙未義兵日記』 ; 金鼎燮, 『日錄』 ; 金道鉉, 『碧山先生倡義日錄』 ; 朴周大, 『渚上日月』 ; 琴錫柱, 『日記』 ; 권대웅, 『경북독립운동사』Ⅰ(의병편), 경상북도안동문화연구소, 2012 ; 김상기, 「1895~1896년 安東義兵의 思想的 淵源과 抗日鬪爭」, 『사학지』 31, 1998 ; 권대웅, 「을미의병기 안동유림의 의병투쟁」, 『大東文化硏究』 제36집,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000 ; 권대웅, 「안동의진과 창의대장 권세연」, 『乙未年安東義兵將星臺權世淵先生追慕學術講演會』, 안동청년유도회, 2007.7 ; 권오영, 「星臺 權世淵의 생애와 사상」, 『乙未年安東義兵將星臺權世淵先生追慕學術講演會』, 안동청년유도회, 2007.7.
  • 권세연 생가(경북 봉화)
  • 안동의병 창의지-봉정사(경북 안동)
  • 「경상도안동창의대장권세연격」
  • 「경상도안동창의대장권세연격(창의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