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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두규 朴斗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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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두규
한자명 朴斗圭
본 관  
이 명  
출신지 제주(濟州)
생몰년월일 1897. 6. 4 ~ 미상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제주군 신좌면 조천리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08)

1897년 6월 4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제주군 조천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제주도의 만세운동은 지역의 유지와 기독교계 인물들의 주도로 계획되었다. 그 중 조천리의 유지 김시학金(時學)의 아들 김장환金(章煥)은 서울 휘문학교(徽文學校, 현 휘문고등학교)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1919년 3월 15일 제주도로 돌아가 백부 김시우金(時宇)에게 그 소식을 자세히 전하였다. 이를 들은 김시우는 “우리도 대한 민족이다. 독립운동에 결사 진력하자”는 취지로 주도적으로 나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참여할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때 적극 찬동하여 함께 거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만세운동 계획에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조천리에 위치한 미밑동산에 모여 생사를 함께 할 것을 맹세하고, 동산의 이름을 ‘만세동산’이라 하였으며, 여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일은 3월 21일로 정하고, 군중 동원을 위해 신촌(新村)·함덕(咸德) 등 인근 지역에 연락하는 등 만세시위 준비 작업을 분담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오후 3시경 계획을 주도한 사람들과 함께 만세동산으로 갔다. 연락을 받은 5백여 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김시범金(時範)이 큰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김장환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손에 태극기를 든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연창하며 큰 길로 나섰다. 그러나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총검으로 무장한 일제 경찰이 시위 진압에 나서면서 시위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고, 주도자 12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때 붙잡혔다. 그러나 만세시위의 열기는 식지 않고, 3월 22일에 다시 군중들이 모여 시위를 전개하고, 체포된 애국지사 석방을 요구하였다. 만세시위는 3월 24일까지 이어졌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그 해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중 일부가 부분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그대로 유지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10월 중순경 제주도에 들어와 이른바 신일본주의(新日本主義)를 선전하던 국민협회(國民協會) 총무 정병조(鄭丙朝)에게 협박장을 보냈다는 이유로 붙잡혀 1921년 3월 1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8월을 받고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두규 재판 보도(『매일신보』 1919. 5. 1) [판형1]

 

⋮박혜미⋮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5. 29 ; 「신분장지문원지」 ; 「범죄인명부」 ; 『신한민보』, 1921. 4. 7 ; 『동아일보』, 1921. 3. 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박두규 재판 보도(『매일신보』 1919.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