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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도현 朴道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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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도현
한자명 朴道玄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북 익산(益山)
생몰년월일 1865. 2. 5 ~ 1919. 4. 4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익산면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4월 4일 전라북도 익산군 익산면 이리시장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4)

1865년 2월 5일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춘포면(春浦面) 동화리(同化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이웃 마을인 덕실리(德實里)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일찍부터 기독교를 믿었다. 1919년 4월 4일 익산면 이리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4년 호남선(湖南線)이 모두 개통된 이래 익산면 이리(裡里)는 철도 교통을 비롯한 호남지역 육상 교통의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1919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만세시위에 관한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이리 읍내에서는 3월 26일부터 산발적이지만 격렬한 만세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이를 제압하고자 일본 헌병과 보병 중대가 이리역(裡里驛) 앞에 주둔하고 있었다.

옥구(沃溝)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문용기(文鏞祺)가 이리 읍내로 와 장경춘(張京春) 등을 비롯한 기독교 신자들과 함께 이리시장 장날인 4월 4일에 다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때 문용기·장경춘 등과 함께 시위를 적극적으로 준비하였다. 4월 4일 이리 읍내 장날에 다른 기독교인 300여 명과 함께 장터에 나가 독립선언서를 비롯해 조선 독립의 정당함을 역설하는 각종 격문을 나누어 주었다. 이후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선두에서 시위 행진을 이끌었다.

만세시위에 참가한 군중이 더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여러 사람이 방망이를 들고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제 당국은 이리 읍내 소방대원들과 일본인 소유 대교농장(大橋農場)의 농장원 수 백여 명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시위 군중을 진압하였다.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자 출동한 일본 군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고, 시위대에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만세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군경의 무차별 총격으로 문용기·장경춘 등과 함께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광복 후인 1949년 5월 이리 군민이 뜻을 모아 만세시위가 시작된 읍내 장터에 그들을 기리는 순국열사비(殉國烈士碑)를 세웠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직접 비문을 짓고 휘호를 썼다. 1971년에는 이리역 앞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가 주도한 3·1운동 유적보존운동의 일환으로 3·1운동 유적기념비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석지훈⋮

|참고문헌|

「제적등본」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이리문화원 편, 『내 고장 이리의 뿌리』, 이리문화원, 1990 ; 익산시사편찬위원회 편, 『익산시사』 中, 익산시, 2001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 1운동 Ⅱ- 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이덕주, 「익산 4. 4 만세운동과 그 역사적 의미」, 익산4. 4만세의거 81주년기념 학술세미나 발표자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