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곽한일 郭漢一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곽한일
한자명 郭漢一
본 관 청주
이 명 자 원우(元佑), 호 장암(壯菴)
출신지 충남 아산
생몰년월일 1869. 12. 10 ~ 1936. 4. 12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홍주의병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6년 홍주의병에 참여하여 참모로 활동하였으며, 1913년에는 독립의군부 총무총장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869년 12월 10일 충청남도 아산(牙山)에서 태어났다. 자는 원우(元佑), 호는 장암(壯菴)이다.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이다. 1906년 최익현이 호서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독려하자, 5월 4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해미성을 점령하려 하였다. 이때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이끄는 홍주의병이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항전하고 있었다. 일본군 대병력이 홍주성을 포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5월 29일 남규진(南圭振)과 함께 4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홍주의병에 합류하였다. 5월 30일 밤부터 일본군이 홍주성을 공격하자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홍주성 전투 후 탈출하여 최익현 의병부대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최익현도 패하여 압송된 이후라 독자적으로 거사를 준비하였다.

곽한일 의병장이 사용한 검 [판형2]

같은 해 11월에 예산군 한곡에 있던 전 참판 이남규(李南珪)의 집에서 김덕진(金德鎭)·이용규(李容珪)·박윤식(朴潤植)·황영수(黃英秀)·박창로(朴昌魯)·이만식(李晩植) 등과 모여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가 되었다. 수백 명의 의병을 예산읍 일대에 배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11월 20일 예산읍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일본 헌병대에 누설되어 11월 17일 새벽 적의 기습을 받고 체포되었다. 공주 경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경성 평리원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듬해 전남 신안 지도(智島)로 종신형을 받고 유배되었다.

독립의군부 체포 보도(『신한민보』 1913.8.22) [판형2]

1912년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1913년 2월에 독립의군부의 총무총장으로 활약하였다. 독립의군부의 조직 구성, 의군부원 모집과 군자금 모금 등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 투쟁을 전개하다 1914년 다시 발각되어 유배되었다. 1916년에 종신 집행유예로 바뀌어 1936년 4월 12일 사망할 때까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서진교⋮

|참고문헌|

황현, 『매천야록』, 1955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 196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7, 1970·19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별집 1, 1970·1974 ;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006 ; 『대한매일신보』 1907.7.5 ; 『매일신보』 1913.8.14.
  • 곽한일
  • 곽한일 의병장이 사용한 검
  • 곽한일 집터
  • 독립의군부 체포 보도(『신한민보』 1913.8.22)
  • CJA0000021 판결문(평리원, 1907.7.2)
  • CJA0000353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3.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