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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일리아 朴일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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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일리아
한자명 朴일리아
본 관  
이 명 한국명 박윤천(朴允天)
출신지 러시아
생몰년월일 1891 ~ 1938. 5. 25
운동계열 노령방면
관련 단체 니항 부대, 특립 사할린 빨치산 부대, 대한의용군, 대한혁명통군서
관련 사건 니항 부대, 특립 사할린 빨치산 부대, 대한의용군, 대한혁명통군서
주요 활동 1919년 말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례에서 니항 부대 조직, 니항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로 이동하여 특립 사할린빨치산 부대 조직,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당시 고려혁명군에 통합되기를 거부하다 무장 해제를 당함, 1921년 말부터 시작된 원동 해방 전쟁에 참가, 1922년 8월 대한혁명통군서를 조직하고 군정위원장에 선임
포상훈격(연도) 애국장(2006)

연해주 출신으로 한국 이름은 박윤천(朴允天),러시아 이름은 박 일리아 하리토노비치(Пак Илья Харитонович)이다.

1891년 연해주의 두만강 연안 포시예트 구역 크라스노예 셀로(Красное село, 한국명 : 녹동촌)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현지의 소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아무르주 니콜라예프스크 지방에 가서 나나이스크 마가이촌에서 소학교 교사로 일하였다.

1918년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례(한국명: 니항(尼港))를 점령하였다. 이에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박 바실리(박병길)·김낙현(김 인노겐치이)·정서화·엄지연 등과 함께 고려청년동맹(高麗靑年同盟)을 조직하여 선전 사업을 전개하였다. 1919년 여름 아무르강 하류에서 러시아 빨치산 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한인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였다. 다른 빨치산 부대들 즉, 유조심 부대·김낙현 부대·홍의표 부대·안기석 부대와 연합하여 700~750명으로 이루어진 연합 부대를 조직하고 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1월 트랴피친의 빨치산 부대가 니콜라예프스크에 도착하자 고려청년동맹과 한인들은 트랴피친 부대 안에 4개 중대 약 400명으로 이루어진 니항 부대를 조직하였다. 니항 부대에서 부대장 싸소프를 보좌하는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20년 3월 11일 일본군이 갑자기 트랴피친 부대를 기습 공격했을 때 니항 부대를 이끌고 최전선에서 싸워 큰 전공을 세웠다. 니항 사변 이후 부대를 이끌고 아무르강을 따라 이동하여 1920년 가을 시베리아 자유시(스바보드느이)에 도착하였다. 12월 14일 치타에서 원동공화국 한인부 간부들과 회의를 하여 전한의병대회(全韓義兵大會)를 개최하여 통합된 한인 부대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자유시에 모여든 모든 한인 부대들을 통합하라는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에이헤의 명령에 따라 1921년 1월 21일 조직된 특립 사할린 빨치산 부대(약칭 사할린부대)의 군정위원에 임명되었다. 3월 15일 자유시 인근 마자노프에서 전한의병대회(全韓義兵大會)를 개최하여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를 조직하여 군사위원으로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결성하였다. 그 해 5월 상하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상해파) 창립 대회에서 군사부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1월 이르쿠츠크에서 코민테른 원동비서부가 조직되고 그 휘하에 고려혁명군정의회가 만들어져 자유시에 모여든 한인 부대들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하며 전한군사위원회와 대립하였다. 5월 고려혁명군정의회의 명령에 따라 부대를 이끌고 수라세프카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고려혁명군정의회와 전한군사위원회 사이에 통합 운동이 실패하자 6월 28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지원을 받은 고려혁명군이 대한의용군을 무장 해제시키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자유시 참변 이후 자유시를 탈출하여 북만주로 갔다. 1921년 12월 이만 전투 이후 원동 해방 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의용군사위원회의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부대원들을 데리고 참가하였다. 1922년 8월 12일 연해주 이만에서 대한독립군단 대표 김좌진(金佐鎭)·박두희(朴斗熙), 군비단 대표 박동규(朴東奎) 등과 함께 연합 회의를 개최하여 대한혁명통군서(大韓革命統軍署)를 조직하고 군정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참모부장에는 임표(林彪), 총사령관에는 김좌진이 선임되었다. 10월 원동 해방 전쟁이 종결된 후 해산되었다.

원동 해방 전쟁이 종결된 후 법률 과정을 이수하고 하바롭스크주의 검사국에서 일하였다. 1936년 1월 21일 원동주 내무 인민 위원부에 반혁명 혐의로 붙잡혀 하바롭스크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4일 소련 내무 인민 위원부 산하 특별 재판소에서 3년을 받고 오렌부르그로 유형을 갔다. 1937년 4월 29일 오렌부르그시 내무 인민 위원부에 다시 붙잡혔다. 1938년 5월 25일 소련 군사 최고 법정에서 사형을 받고 당일 하바롭스크에서 처형되었다. 1959년 2월 24일 소련 군사 최고 법정 결정에 따라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일리아에 대한 일제 측 보고(1922. 11. 10) [판형1]

 

⋮윤상원⋮

|참고문헌|

張道政, 「高麗共産黨の沿革」, РГАСПИ(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ф.495, оп.154, д.248 ; 「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 『韓國共産主義運動史 資料篇』 Ⅱ, 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 『독립신문』, 1922. 9. 11, 1923. 3. 7, 1924. 5. 31 ; 마트베이 김(Ким М.Т.), 『극동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에서 조선인 국제주의자들, 1918-1922(Корейские интернационалисты в борьбе за власть Советов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1918-1922』, Москва, 1979 ;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 박환, 『재소한인민족운동사』, 국학자료원, 1998 ; 임경석, 『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2003 ; 『스탈린 시대 정치탄압 한인 희생자들 1934-1938(Корейцы жертвы политических репрессий в СССР 1934-1938)』 제1권, Москва, 2000 ; 『스탈린 시대 정치탄압 한인 희생자들(Корейцы жертвы политических репрессий в СССР 1934-1938)』 제3권, Москва, 2004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10.
  • 박일리아에 대한 일제 측 보고(1922.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