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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민영명 閔泳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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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민영명
한자명 閔泳明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남 해남(海南)
생몰년월일 1909. 2. 1 ~ 1960. 4. 24
운동계열 학생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광주학생운동
주요 활동 1928년 광주공립농업학교 동맹휴학 참가,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농업학교 학생 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건국포장(1992)

1909년 2월 1일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마산면(馬山面) 노하리(路下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1927년 광주공립농업학교(光州公立農業學校)에 진학하였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광주면(光州面) 누문리(樓門里, 현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 장학실(張學實)의 집에 머물렀다.

1928년 6월 29일 농업학교 2학년 재학 중 동맹휴학에 참여하였다. 당시 학생들은 민족 차별 철폐, 일본인 교사 모리오카(盛岡)의 사직, 교육 시설 확충, 한국어 수업 증설, 모집 정원 증가 등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독서회와 같은 학생 조직에 관여하는 동급생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맹휴에는 2~4학년 115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맹휴는 주도자들이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고 많은 학생들이 무기정학 등의 처분을 받으며 일단락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시작되자 이에 주도적으로 가담하였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 광주중학 학생들 사이의 충돌로 인한 시위가 확산되자 농업학교 학생들도 참여를 결정하고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이때 시위에 참여하여 우체국, 광주도립병원을 거쳐 광주천 건너 우시장까지 행진하였다가 학교로 돌아왔다.

임시휴교 동안 많은 학생들이 붙잡혔으나, 다시 학생시위를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그 결과 각 학교 학생들이 12일에 시위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당일 첫 수업시간 중에 학생 약 200명과 함께 시위에 나섰다. 학교를 나와 이미 시위를 벌이고 있던 광주고보 학생들과 합류하였다. 곤봉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여 광주 시내를 행진하며 ‘검거자 석방’을 외쳤다. 긴급 출동한 경찰들이 학생들을 둘러싸고 해산시킬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다가, 결국 일제 경찰에 붙잡히게 되었다.

경찰 조사를 받던 중 1930년 2월 11일 학교로부터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한 이유로 인하여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긴 조사를 거친 끝에 같은 해 7월 17일 예심이 종결되어 비로소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해 10월 1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4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붙잡힌 후 풀려날 때까지 거의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명환⋮

|참고문헌|

「예심종결결정서」, 광주지방법원, 1930. 7. 17 ;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30. 10. 1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 한규무, 『광주학생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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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민영명 선생의 광주지방법원 판결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