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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재헌 朴在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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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재헌
한자명 朴在憲
본 관 밀성(密城)
이 명 호: 원당(原堂), 이명: 박재곤(朴在坤), 박재권(朴在勸), 박영재(朴榮在)
출신지 경북 달성(達城)
생몰년월일 1900. 1. 25 ~ 1986. 2. 28
운동계열 문화운동
관련 단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사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요 활동 1919년 3.1운동 때 대구의 만세운동 참여, 1922년 달성군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공채모집 및 영문 󰡔자유지󰡕의 간행 및 배포 참여, 1926년 대구미국선교회 사무원으로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독립 지원 호소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00년 1월 25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화원면(花園面) 명곡동(椧谷洞)에서 아버지 박기수(朴璂秀)와 어머니 충주 석씨(忠州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성(密城)이고 호는 원당(原堂)이며 어렸을적 본명은 박재곤(朴在坤)이었고 이명은 박재권(朴在勸)·박영재(朴榮在)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여 사립 흥화학교(興和學校)를 나와 한문 수학을 하였다. 1917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대구의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입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계성학교 3학년생으로 대구고등보통학교 및 대구 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과 함께 3월 8일 대구 서문 밖 시장의 만세운동, 3월 1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그 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다.

1920년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 평남도청(平南道廳) 폭파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나 박재헌으로 개명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22년 달성군 중심으로 전개된 납세 거부와 일본상점 물품구매 반대 유인물 배포, 독립 공채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워싱턴회의 독립청원을 위해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기재한 영문 『자유지(自由誌)』의 간행과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배포 등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고 밀양(密陽)으로 피신하였다.

1924년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고 같은 고향 동지 이정호(李貞浩) 등의 중국 망명을 도왔다. 1925년 밀양의 사립 집성(集成)학교에서 교사를 하였으며, 동지 고인덕(高仁德)과 접촉하여 밀양교회를 중심으로 농촌 사업을 가장한 독립운동을 추진하려다가 발각되어 다시 대구로 피신하였다. 1926년 대구미국선교회(大邱美國宣敎會)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미국 선교사들에게 지속적으로 한국독립의 지지와 지원을 호소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을 당하여 강제 투옥되었고, 광복할 때까지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5. 31) [판형1]

 

⋮전병무⋮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5. 31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국역 고등경찰요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3, 201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정휘창,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사』, 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부, 1991.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5.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