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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모원규 毛元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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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모원규
한자명 毛元奎
본 관  
이 명  
출신지 평북 정주(定州)
생몰년월일 1890. 3. 9 ~ 1919. 3. 31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정주군 정주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31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면 만세시위 참여 중 피살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1)

1890년 3월 9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덕언면(德彦面) 대성동(大成洞)에서 태어났다. 정주면(定州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현장에서 희생되었다.

정주는 평안북도 서남부 해안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박천군(博川郡)·태천군(泰川郡), 서쪽으로는 선천군(宣川郡), 남쪽으로는 황해도, 북쪽으로는 구성군(龜城郡)과 접하고 있다. 1919년 3월 31일 정주면에서 천도교인의 주도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천도교중앙총부 지도자인 김진팔(金鎭八)과 정주 천도교구장인 최석일(崔晳一), 곽산(郭山) 천도교구장인 김경함(金庚咸) 등이 비밀리에 준비한 독립만세시위였다. 천도교인인 김석보(金碩甫)·김공선(金公善)·방열경(方悅卿) 등 세 사람이 대중 동원의 책임을 맡고 정주군 곳곳을 돌았다. 김석보가 서면(西面)과 해산면(海山面)을 순회하고 돌아오던 중 헌병보조원의 검문을 받아 독립선언서 1장이 발각되었으나, 다행히 체포를 면하고 달아날 수 있었다.

거사일인 3월 31일 낮 12시 정주면에 위치한 정주우편국 앞에 모인 시위대는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모신영(毛信永)·모원봉(毛元鳳) 등 집안사람들과 함께 참가하였고,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인근 신안면(新安面)·동주면(東州面)·고현면(高峴面)·이언면(伊彥面)·덕달면(德達面)·아이포면(阿耳浦面)·임해면(臨海面) 등에서 집결한 군중들로 시위대의 숫자는 4,000여 명이 넘었다.

대규모 만세시위에 놀란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여 총칼을 휘두르며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다. 선두에 선 김사걸(金士傑)이 일본군 수비대의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뒤이어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던 최석일은 수비대의 발포로 역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일본군의 무자비한 시위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대가 계속 행진을 하자, 소방대는 갈고리를 휘둘렀고 수비대는 총격을 가하였다. 분노한 시위대와 함께 식민 통치의 상징적 기관인 면사무소에 들어가 서류와 집기를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자, 다시 일본군 수비대가 발포하였고 소방대는 사냥총을 쏘았다.

결국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최석일·김사걸 등을 비롯한 최소 28명, 최대 120여 명의 사람들이 일본군의 총칼에 맞아 희생당하였다. 이날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음으로 일제 군경의 총칼을 피할 수 없었고, 모신영·모원봉 등 친척들과 함께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참고문헌|

『독립신문』, 1921. 3. 2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2권, 1971 ; 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평안북도지』, 1973 ; 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 Ⅰ- 중부·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1. 담아래 의로운 무덤(신한민보, 192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