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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모신영 毛信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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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모신영
한자명 毛信永
본 관  
이 명  
출신지 평북 정주(定州)
생몰년월일 1869. 7. 28 ~ 1919. 3. 31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정주군 정주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31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면 만세시위 참여 중 피살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1)

1869년 7월 28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덕언면(德彦面) 대성동(大成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평북 정주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망하였다.

평안북도 서남부 해안에 위치한 정주군은 동쪽으로는 박천군(博川郡)·태천군(泰川郡), 서쪽으로는 선천군(宣川郡), 남쪽으로는 황해도, 북쪽으로는 구성군(龜城郡)과 접하고 있다.

정주의 본격적인 대규모 시위는 1919년 3월 31일 천도교인의 주도로 일어났다. 천도교중앙총부의 지도자로 활약하던 김진팔(金鎭八)은 1919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경성 교외 우이동(牛耳洞) 봉황각(鳳凰閣)에서 열린 49일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독립만세시위와 관련된 지령을 받고 2월 말에 정주로 돌아왔다. 그는 정주 천도교구장인 최석일(崔晳一)과 교구 직원인 서인화(徐仁和)·백중빈(白重彬)·이근배(李根培)·박윤길(朴允吉), 그리고 곽산(郭山) 천도교구장인 김경함(金庚咸) 등과 서주동(西州洞)에 위치한 박형석(朴瀅錫)의 집에서 비밀리에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 모인 천도교 지도자들은 정주면 장날인 3월 31일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대중 동원과 시위 준비에 들었다.

거사 당일인 3월 31일 신안(新安)·동주(東州)·고현(高峴)·이언(伊彦)·복달(復達)·아이포(阿耳浦)·임해(臨海) 등 군내 각 면에서 4,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위해 모여들었다. 낮 12시 정주우편국 앞에 모인 시위대는 독립선언서를 서로 나누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만세시위에 참여해 시위대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 곳곳을 행진하였다.

일제 수비대는 기선을 제압하고자 분주하였고, 수비대장 도비타(飛田) 중위는 시위대를 향해 군도를 휘두르다가 결국 발포 명령까지 내렸다.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최석일(崔晳一)이 죽임을 당하였고, 김사걸(金士傑)도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멈추지 않자 수비대는 총격을 계속하였다. 시위대가 면사무소에 들어가 서류와 집기를 부수고 행진을 시작하자 수비대는 다시 발포하였다.

이날의 시위 현장에서는 최소 28명, 최대 120여 명의 시위대가 수비대의 총이나 칼에 맞아 사망했는데, 그 인명 피해는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일어난 만세시위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이날 시위에 나섰다가 아들 모원규(毛元奎)와 조카 모원봉(毛元鳳)과 함께 수비대가 쏜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참고문헌|

『독립신문』, 1921. 3. 2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2권, 1971 ; 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평안북도지』, 1973 ; 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 Ⅰ- 중부·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