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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종철 金鍾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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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종철
한자명 金鍾哲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선산(善山)
생몰년월일 1924. 1. 19 ~ 미상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광복군 제1지대원으로 1944년 말까지 유격 공작 및 중국군 지원 임무 수행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24년 1월 19일 경상북도 선산군(善山郡) 도개면(桃開面) 다곡리(多谷里)에서 태어났다. 집안과 성장과정, 한국광복군 입대 과정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알 수가 없다. 광복군에 입대하여 중국 후난성(湖南省) 장샹현(蔣鄕縣) 지구의 유격종대(遊擊縱隊)에서 공작임무를 수행하였다.

 

1944년 말을 전후하여 후난성 일원에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과 중국군에 합류하는 한인 청년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중국군 지휘관들의 경우 한인 학도병들을 역이용하여 대적공작(對敵工作) 임무에 투입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제9전구사령부(第)9(戰區司令部)에서 활약 중이던 이병곤(李炳坤)은 제9전구사령관 쉐웨(薛岳)에게 일본군을 탈출한 한인 학도병들을 후방지역에 집결시켜 교육을 실시할 것과 제9전구를 단위로 하는 광복군 편성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쉐웨 사령관이 이를 수락하여 일본군에서 탈출해 온 100여 명의 한인 청년들과 앞으로 탈출할 한인 청년들 전원을 제9전구사령부 소재지인 구이둥(桂東)과 전방지휘소 소재지인 장시성(江西省) 이춘(宜春)에 집결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쉐웨 사령관의 지시가 각 부대에 하달된 직후 각지의 한인 청년들이 구이둥과 이춘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전재덕(全在德)·권구원(權九瑗), 도중에 합류한 학도병 박정렬(朴貞烈)·유영중(柳英中) 등과 함께 구이둥으로 이동하였다. 1945년 1월을 전후하여 제1진으로 도착한 것이다. 당시 구이둥의 중국군 제9전구사령부에는 총 40여 명의 한인 청년이 집결하고 있었다.

 

1945년 2월 중국 군사위원회와 광복군총사령부는 서로 협의하여 제9전구 내에 있는 한인 전원을 대상으로 한국광복군 제1지대 예하의 제3구대를 편성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945년 2월 15일 이병곤을 구대장 겸 지구책임자로 하는 제3구대가 창설되었다. 제3구대는 동지 획득 및 중국군 작전 지원을 주된 임무로 하였으며, 분대와 반으로 조직이 편성되었다. 이 때 유영중을 분대장으로 하는 제1분대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3개월을 기간으로 하는 정규 군사 교육훈련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교육훈련 도중 중국군 각 전구로부터 광복군 공작요원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다. 그래서 제3구대는 군사 교육과 공작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교육훈련을 변경하였다. 제3구대 본부는 제1분대 대원 가운데 전재덕·강익진(康翊鎭)·황갑수(黃甲秀)를 각각 조장으로 하는 3개 공작조를 편성한 후 이들을 중국군 전선에 파견하여 공작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 시기 동지들과 함께 전방에서 대적 공작 임무와 중국군 지원 등 다양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 1975 ;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 김광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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