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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흥여 金興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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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흥여
한자명 金興汝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라북도 익산
생몰년월일 1889 ~ 미상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이규홍 의병부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9년 이규홍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전북 익산 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5)

전라북도 여산군(礪山郡, 현 익산시) 북삼면(北三面) 방축리(防築里) 출신이다. 190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21세로 1889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평소 시장에서 짚신과 목화 등을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했던 상인 출신으로, 이규홍(李圭弘)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과 함께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당하는 등 국권상실이 현실화되자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 갔다.

 

당시 호남지역에서는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거의를 결의하였다. 이후 거의(擧義)가 본격화되자 유림세력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 출신들도 이에 호응하면서 의병부대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규홍이 익산에서 거의하여 의병을 규합하자, 이에 호응하여 동참하였다.

 

을사늑약 직후 호남에서 최초로 거의한 의병부대는 최익현(崔益鉉)을 중심으로 한 태인의병이었다. 1906년 6월 전북 태인군(泰仁郡)의 무성서원에서 창의 격문을 발한 뒤 공식적으로 거의한 태인의병은 전라도 각지를 순회하면서 의병의 세력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기 직전 의병장 최익현이 관군과 동족상잔을 피하고자 의병을 해산했기 때문에 큰 무력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비록 태인의병은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한지 열흘 만에 해산하였지만, 이후 호남지역의 의병 결집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이규홍은 1906년 4월 25일 친구 박이환(朴駬桓)·문형모(文亨模)와 거의할 것을 맹약하고 뜻을 같이할 동지들을 규합해 가며 1907년 12월 거의하였다. 이때 익산군의 정판성(鄭判成), 고산군(高山郡)의 김성찬(金性賛)과 함께 이규홍 의병부대에 찾아가 합세하였다. 곧이어 이규홍 부대는 박이환의 형인 박영환(朴永桓)으로부터 군자금을 지원받아 총기 300여 정과 탄약 20여 되, 그리고 칼 50여 자루, 화약 10여 되를 마련하였다. 동료 의병 200여명과 함께 1907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해 갔다.

 

먼저 이들은 1907년 12월 19일(음, 11월 15일) 고산군 가금리(柯琴里)에서 일본군과 첫 교전을 벌여 일본군 29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진안군(鎭安郡)·장수군(長水郡)·용담군(龍潭郡) 등지에서도 추격해 도던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 44명을 사살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의병 탄압책이 더욱 거세지면서 여러 의병이 붙잡히는 등 전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의병장 이규홍은 1908년 5월 20일 부대를 해산하였다.

 

이규홍 의병부대가 해산 된 이후에도 동료 김성찬, 정판성 등 동료 의병 수십명과 함께 전북 익산과 고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항일 유격전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세가 거세지던 1909년 2월 무렵 익산 군내에서 활동하다가 결국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일로 1909년 11월 2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74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5 ; 홍영기, 『한말 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조동걸, 「호남의병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 『호남학연구』 26, 1998 ; 김상기, 「이규홍의 익산의병과 항일투쟁」, 『전북사학』 54,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