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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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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락 金興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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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흥락
한자명 金興洛
본 관 의성(義城)
이 명 자 : 계맹(繼孟), 호 : 서산(西山)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安東)
생몰년월일 1827. 10. 25 ~ 1899. 10. 11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권세연 의병부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896년 안동의병에 참여해 항일투쟁 전개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5)

1827년 10월 25일 경상북도 안동부(安東府)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진화(金鎭華)와 모친 여강(驪江)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학봉 김성일의 11대 종손이다.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김성일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 밀암(密庵) 이재(李栽) -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는 퇴계 학맥을 계승하였다. 1895년 내부(內部)에서 유길준(俞吉濬)의 『서유견문』을 보내오자 즉시 돌려보내며 위정척사론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삶을 실천하고자 하여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학봉 김성일의 종손으로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유학적 가르침을 몸에 익히며 자랐다.

 

개항 이후 일본과 서양세력이 침투하며 서구의 제도와 문물이 급속히 전해지는 상황에서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유교적 가치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현실 타개의 방법으로 의병봉기를 선택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의 유생들이 의병항쟁에 나섰다. 을미의병 당시 안동지역 지도자로 참여해 1차 안동 의병부대의 구성을 주도하였다. 단발령을 접한 직후 곽종석(郭鍾錫)·김도화(金道和)·권진연(權晋淵) 등과 함께 통문을 발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안동관찰부를 습격해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1896년 1월 17일 봉정사에 40~50명의 유생들이 모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고, 다음날 1,000여 명이 모인 향회에서 1월 20일 거병할 것을 결의하였다. 1월 20일 의병조직을 위한 대회에는 1만여 명이 운집하였으며, 권세연(權世淵)이 대장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1월 29일 관군이 안동부를 공격해 패함에 따라 권세연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3월 12일 사퇴하였다. 이에 의병장으로 김도화(金道和)를 추천하여 차기 의병장으로 선출시켰고, 이때 류도성과 함께 지휘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지휘장을 역임하였지만, 고령의 나이로 실제 전투를 지휘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지휘장으로 있을 당시 머물던 금계에 의병부대의 본부인 도소(都所)가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마을이 공격을 받거나, 욕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7월 22일 포장(砲將) 김회락(金繪洛)과 척후장 김진의(金鎭懿)가 ‘안동병대(安東兵隊)’에 의해 붙잡히는 과정에서, 포박을 당하고 가산이 압수되었다.

 

안동 의병부대는 9월 16일 관군 대대장 이겸제(李兼齊)가 병정 100여 명을 이끌고 안동부에 도착하면서 일단락되었다. 9월 24일에는 의병장 김도화가 물러났으며, 9월 30일 선봉 유시연(柳時淵)이 ‘포(砲)’를 반납하고 물러감에 따라 안동의병이 종결되었다. 이후 금계 ‘서산재(西山齋)’에서 학문에 몰두하다 1899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집으로 본집 24권, 속집 6권, 부록 2권으로 구성된 32권 16책의 『서산문집(西山文集)』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흥락 간찰(1888년 추정) [판형1]

 

⋮노상균⋮

|참고문헌|

李兢淵, 『乙未義兵日記』 ; 김상기, 『한말 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김상기, 「1895~1896년 안동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항일투쟁」, 『사학지』 31, 1998 ; 김희곤, 「서산 김흥락의 의병항쟁」, 『한국근현대사연구』 15, 2000 ; 김순석, 「서산 김흥락의 이상과 현실 대응」, 『국학연구』 32, 2017.
  • 김흥락 간찰(1888년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