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운봉 金雲鳳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운봉
한자명 金雲鳳
본 관  
이 명  
출신지 강원도 고성(高城)
생몰년월일 1917. 1. 10 ~ 1999. 4. 11
운동계열 일본방면
관련 단체 고문그룹(高文グループ)
관련 사건 ‘고문그룹(동경) 사건’
주요 활동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주오대학(中央大學) 재학 중 한국인 학생들과 함께 민족 해방 방법을 논의, 1940년 4월 ‘고문그룹’을 결성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17년 1월 10일 강원도 고성(高城)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금본운봉(金本雲鳳)이다. 고성공립보통학교를 나와 춘천(春川)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中央大學) 제1예과 2학년으로 편입해 1940년 3월 수료하였다. 이후 같은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1942년 9월 졸업하였다.

 

제1예과 재학 당시 민족차별의 현실을 직접 보고, 한국인이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선 독립하는 길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1938년 9월 동기 고담룡(高湛龍), (高田湧淸)의 제안을 받아 독립을 위한 준비에 투신하였다. 한국인이 멸시당하는 것은 문화 수준이 일본보다 낮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자신들의 지식을 활용해 일제강점기 한국의 부흥을 도모하고 이를 독립운동으로 이끌 방법을 모색하였다.

 

1940년 4월, 고담룡과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 준비를 표방한 ‘고문그룹(高文)グループ’을 결성하였다. 동기생 장일(張馹), 신기현(申琪鉉), 장사건(張師健) 등에게 권유하여 비밀회합에 합류하도록 하였고, 1942년까지 모임을 가졌다.

 

19회에 걸친 모임에서는 실력양성과 독립의 방안,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이를 독립운동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 등을 논의하였다. 1940년 2월 장제스(蔣介石)의 활약으로 일제가 곧 패망할 것이므로 장제스를 원조할 방법을 의논하고, 4월 인도 간디(Gandhi)의 ‘비협력 무저항주의’를 ‘협력 무저항주의’로 고쳐 운동의 방침으로 삼고 실력양성을 도모할 것, 상황에 따라서는 타력(他力)에 의존하기도 할 것을 협의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전쟁 상황을 고려해 미국 의존 방책을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41년 10월에는 독립 후에 나치즘(Nazism)을 규범으로 한 통치체제를 수립할 것을 논의하였다. 1942년의 회합에서는 징병제를 조선 민중이 무력양성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하고, 독립운동에 이용할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활동을 모색하다 1942년 8월경 붙잡혔고, 1944년 8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4월 형무소에서 영양실조에 걸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광복 후에는 전국청년대동단결총본부(全國靑年大同團結總本部) 위원장,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靑年總聯盟) 최고위원, 국민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44. 6. 5) [판형1]

 

⋮김진웅⋮

|참고문헌|

「예심종결결정(고전용청 외 6인)」, 대구지방법원, 1943 ; 「판결문(구호림 등 6인)」, 대구지방법원, 1944. 6. 5 ; 「刑ノ執行停止指揮書」,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1945.4.21, 국가기록원 소장.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44. 6. 5)
  • 1.김운봉 선생 묘소 앞면(대전현충원-2-774)
  • 2.김운봉 선생 묘소 뒷면(대전현충원-2-7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