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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성화 朴性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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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성화
한자명 朴性和
본 관  
이 명  
출신지 함남 갑산(甲山)
생몰년월일 1921. 11. 19 ~ 1993. 1. 29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삼천당(三千黨)
관련 사건 삼천당(三千黨)
주요 활동 1944년 8월 평양의 42보병부대 한국인 학도병들과 함께 비밀결사 삼천당 조직하고 참모장으로 선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21년 11월 19일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 갑산면(甲山面) 서부리(西部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우원형호(宇原亨浩)을 썼다. 1941년 3월 서울의 경기공립중학교(京畿公立中學校)를 졸업하고, 1942년 4월 일본 도쿄(東京)의 사립 와세다제1고등학원(早稻田第一高等學院) 이과理(科)에 입학하였다.

와세다제1고등학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3년 11월 상순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배를 타고 귀향하던 도중 함북 청진항(淸津港)에서 그곳 수상경찰서(水上警察署)로 연행되어 이른바 조선학도특별지원병(朝鮮學徒特別志願兵)으로 징집되었다. 1944년 1월 20일 평양부(平壤府)의 조선주둔 일본군(日本軍) 제42부대에 입대하였다. 1944년 4월 1일 편제개정(編制改正)에 의해 ‘조선제42부대 마츠모토대(松本隊)’로 전속되었다.

1944년 6월 18일 일본육군 간부후보생 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입대 후 부대 내 한국인 병사에 대한 모멸과 구타, 간부후보생 시험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합격률 차이 등 여러 차별대우로 인해 불만과 민족의식이 강해졌다. 간부후보생 훈련에도 소극적으로 임했으며, 일본인 후보생들에게 ‘내선일체(內鮮一體)’ 등에 대해 자주 비판하였다. 나아가 동료 한국인 학병들과 함께 ‘집단탈출’을 계획하고 이를 주도하였다.

1943년 10월 일제는 ‘조선인 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를 공포하고 그간 입영이 연기되었던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1943년 창설된 평양사단은 42·43·44보병부대(步兵部隊)와 47포병부대(砲兵部隊), 48공병부대(工兵部隊), 50치중병부대(輜重兵部隊)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주로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출신 학생들이 다수 입대하였다. 이 부대들에 각기 배속되었던 한국인 학병들은 1944년 7월 훈련병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었다. 이에 42부대 학병들을 중심으로 집단적인 항쟁을 계획하였다.

한국인 학병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자주 생기면서 이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세계정세나 사상논쟁 등이 화제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패색이 점차 짙어져가자 42부대 학병들은 일제패망과 한국독립을 전망하고 “일본군에 끌려가 죽느니 차라리 싸워서 죽음을 이기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1944년 8월 김완룡(金完龍)·최정수(崔正守)·전상엽(全相燁)·김윤영(金允永) 등과 함께 몇 차례 논의한 끝에, 집단적인 탈출을 준비하기 위해 동지를 모아 삼천당(三千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때 참모장(參謀長) 겸 총무책(總務責)을 맡았다. 당시 “우리는 최고학부의 교육을 받았으므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도망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도망 후 독립운동을 위해 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강령으로는 “모든 주의를 초월하여 일적(日敵)과 싸울 것, 군부 내부를 교란시키는 동시에 무장봉기를 일으킬 것, 자치나 참정권 따위 형식상의 독립이 아니라 실질적이 독립을 쟁취할 것” 등을 정하였다. 구체적인 실천 강령으로는 “군 간부 독살, 병영(兵營) 방화, 탄약고 습격, 사령부 관사촌(官舍村) 접수, 타 부대와 연대하여 공동작전, 국외 독립투사들과 긴밀한 연계 도모” 등을 설정하였다.

이렇게 학병들 간의 정신 통일과 구심적 구축에 성공한 후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42부대가 중심이 된 거사 계획은 주로 밤마다 취침시간 전에 방공호에 모여 그 작전을 논의하였다. 먼저 부대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부대를 점령하고 평양시가로 나가자는 것, 화약과 탄약을 입수하여 평양사단을 폭파하자는 것, 일단 부대를 탈출한 후 국경지대 등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자는 것 등 여러 가지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일단 탈출하여 항일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폭파계획도 병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일제가 패망하는 ‘결정적 시기’에 국내 민중봉기의 계기 확보와 소련의 대일(對日) 선전을 고려한 것이었다.

부대 내 정보나 군 수뇌부의 동정을 주시하면서 전세(戰勢)를 세밀히 분석하였다.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이나 필리핀 함락, B29기 내습 등의 정보를 입수하여 동료들을 고무시키고 무기와 식량을 확보하였다. 또 평양 서문여고(西門女高)·정의여고(正義女高) 학생과 연계하여 부대 간, 조직 간 연락을 도모하였다. 거사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탈주로 등을 마련하고 선후책을 짜놓았다. 총책 김완룡의 지휘 아래 각 참모장들이 거사를 주도하기로 하고, 제1지대는 최정수, 제2지는 이철영(李哲永)이 맡아 각 분대·지대를 이끌기로 하였다.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최종 방공호회의에서 거사일을 1944년 10월 1일 밤 12시로 정하였다. 하지만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 간에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거사일은 한 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참여 학병 가운데 노영준(盧永俊)이 헌병대에 있는 예비역 대령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가 미행당한 일과 김완룡이 일본인 상등병을 구타한 사건이 빌미가 되어 탈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같은 해 9월 말 70여 명의 동료 학병들과 함께 헌병대로 연행되었다. 4개월 간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은 후 동료 학병들과 함께 군법회의에 정식으로 회부되었다. 1945년 6월 10일 조선군관구(朝鮮軍管區) 임시군법회의 평양사관구법정(平壤師管區法廷)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3년을 받았다.

1945년 광복으로 풀려났다. 이후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병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초기에 치안 활동 등을 주도하던 학병동맹(學兵同盟)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학병동맹에 반대하여 “우리는 국방의 간성(干城)이 되겠다” 등을 내걸고 학병단(學兵團) 결성을 주도하였다. 김근배(金根培)와 함께 학병단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5년 12월 학병단이 학병군(學兵軍)으로 개편될 때에는 김학천(金鶴天)과 함께 참모(參謀)를 맡았다.

1948년 8월 중순에 ‘지하총선거’ 관계로 수도청(首都廳) 사찰과(査察課)에서 서울의 중학교 교원과 대학생 다수를 검거할 때 함께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3일 이른바 ‘포고령(布告令) 2호’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성화 검거 보도(『독립신문』 1948. 8. 21) [판형1]

 

⋮변은진⋮

|참고문헌|

「판결문」, 조선군관구 임시군법회의 평양사관구법정, 1945.6.10 ; 『동아일보』, 1945. 12. 16 ; 『자유신문』, 1945. 12. 16, 1948. 8. 22 ; 『조선중앙일보』, 1948. 8. 21, 9. 4 ; 『독립신보』, 1948. 8. 21 ; 『경향신문』, 1976. 11. 10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권, 독립문화사, 196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씨의소리』, 1973. 3~1974. 4 ; 계훈제·박순동, 『식민지시대의 지식인』, 청년사, 1984 ; 국가보훈처 편, 『독립유공자구술자료집1 -소년, 구국의 길을 찾다』, 2015.
  • 박성화 검거 보도(『독립신문』 1948.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