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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한룡 金漢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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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한룡
한자명 金漢龍
본 관 선성(宣城)
이 명 자 : 운오(雲五), 호 : 청사(晴沙)
출신지 경상북도 영주(榮州)
생몰년월일 1927. 2. 10 ~ 미상
운동계열 학생운동
관련 단체 안동농림학교 명성회, 조선독립회복연구단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43년 안동농림학교 내 비밀결사 명성회를 조직하고 1944년 안동농림학교 내 비밀결사조선독립회복연구단 참여
포상훈격(연도) 대통령표창(1998)

1927년 2월 10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문수면(文殊面) 적동리(赤東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석진(金奭鎭)이다. 본관은 선성(宣城), 자는 운오(雲五), 호는 청사(晴沙)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성원관굉(城原寬宏)으로 고쳤다. 안정공립보통학교(현 안정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41년 안동의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임학과 9기로 입학하였다. 항일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 조직에 참여하고 활동하였다.

 

1943년 4월 무렵 명성회 조직을 주도하였던 이정선(李貞善)은 안동농림학교 9회생으로 입학하였지만,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후 일본 유학을 떠났다. 명성회 조직 당시 이정선은 일본 유학 중 충칭(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이회술(李會述)을 만나 비밀결사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고 귀국한 상태였다. 명성회는 ‘새 날이 시작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항일사상 고취에 목적을 두고 이정선의 집에서 결성되었다.

 

명성회의 초기 활동은 문예활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이정선의 지도 아래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정선이 회장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권태염(權泰琰)·권오봉(權五鳳)·김홍구(金弘九)·고영찬(高永讚)·박동렬(朴東烈)·최남식(崔南軾)·정현모(鄭賢模)·신두수(申杜洙)·김원현(金元顯)·손성환(孫聖煥)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명성회 회원들은 한글서적을 비롯하여 역사서와 사상서 등을 읽으면서 항일의식을 함양하는 한편, 계몽용 회지인 『あけぼの(아케보노, 새벽·여명)』를 간행하였다. 이때 이정선과 함께 기사 작성과 편집 업무를 담당하며 회지 발간을 주도하였다.

 

1944년 1월부터 1호 50여 부를 등사하여 명성회 회원들과 조선독립회복연구단(朝鮮獨立回復硏究團) 단원, 특별히 선정된 지식인, 경주공립심상소학교(慶州公立尋常小學校, 현 경주중학교),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 학생 등에게도 배부하였다. 1944년 말까지 일본어에 한글을 혼용하여 3호까지 발간하였다. 이 회지에는 항일적 성향의 시와 수필, 국제정세 등을 수록하였다.

 

1944년 11월 안동농림학교 내에 별도로 조직된 비밀결사인 조선독립회복연구단(朝鮮獨立回復硏究團)의 무력투쟁 계획에도 함께 하기로 결정하였다. 안동농림학교 무기고의 교련 수업용 무기를 탈취하여 안동경찰서와 헌병파견대를 점령한 후 의성(義城)으로 진출하여 대구의 일본군 24부대와 교전할 것을 계획하였다. 거사일은 2월 17일로 정했으나, 계획을 수정해 일본군 육군기념일로 경비가 허술한 1945년 3월 10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1945년 2월 초, 10기생이었던 강형원과 현필기(玄弼基) 등이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고, 이들의 가택 수색에서 조선독립회복연구단원 명부가 발견되었다. 그 해 3월 단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을 이유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1945년 8월 16일 기소유예로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김선웅⋮

|참고문헌|

「형사사건부」 ; 안동농림고등학교, 『안동농림40년사』, 1973 ; 안동농림고등학교동창회, 『안동농림항일투쟁약전』 1978 ; 송지향, 『안동향토지』, 1983 ; 안동농림학교, 『안동농림50년사』, 1983 ; 김을동, 『안동판 독립사』, 1985 ; 신승훈, 「해방직전(1943~45)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연구」, 『안동사학』 1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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