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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남정각 南廷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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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남정각
한자명 南廷珏
본 관 의령(宜寧)
이 명 호 : 오산(午山), 아명 : 남영득(南英得·南寧得)이명 : 김석진(金錫鎭), 정섭(丁燮), 우각(迂玨)
출신지 경기 용인(龍仁)
생몰년월일 1897. 12. 22 ~ 1967. 1. 29
운동계열 중국방면
관련 단체 의열단
관련 사건 의열단 황옥경부 폭탄사건
주요 활동 1919년 3월 수원 만세운동, 1920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1922년 의열단 가입, 이후 황옥 경부 폭탄반입 사건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3)

1897년 12월 22일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부친 남팔원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오산(午山)이다. 어릴 때 이름은 남영득(南英得·南寧得)이다.

1913년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에 입학하였고,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수원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독립신문』을 배포하는 등 시위 확산에 노력하였다.

1920년 3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였고, 이후 창춘(長春),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등지를 오가며, 이종암(李鍾岩)·최용덕(崔用德) 등과 독립운동의 진로를 모색하였다.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이후 톈진에 머물던 시기 유자명(柳子明)을 김원봉(金元鳳)에게 소개하여 유자명을 의열단에 입단시켰고, 유자명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의열단 동지들과 공동 생활을 하였다.

1922년 당시 의열단에서는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 침략기관을 폭파하기 위해, 다량의 폭탄과 무기 그리고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 등의 선전 문건을 국내로 밀반입하려 하였다. 그 해 6월초 톈진에서 활동하던 중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무산자동맹회(朝鮮無産者同盟會) 회장 김한(金翰)을 만나 폭탄의 국내 반입과 폭파 활동에 관해 협의하라는 단장 김원봉의 지시를 받았다.

1922년 6월 말 국내로 들어와 김한에게 의열단의 계획을 설명하였고, 김한도 이에 동의하였다. 7월에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김원봉에게 보고한 다음, 재차 국내로 들어와 의열단의 지원자금 2,000원을 김한에게 전달하였다. 그러자 김한은 이 가운데 350원을 돌려주며, 안동현(安東縣, 현재의 中國 遼寧省 丹東市)에 중간 연락기관을 설치할 것을 부탁하였다. 부탁을 받고 안동현으로 가 양한규(梁漢奎)의 집에 머물며, 중간 연락기관의 설치를 시도하였으나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이 일이 어렵게 되자 다시 상하이로 건너 가 김원봉과 폭탄 반입 문제를 상의하였다. 1922년 12월 박기홍(朴基弘)과 함께 다시 서울에 파견되었고, 운니동에 있는 박정명(朴定明)의 집에 잠복하며, 김한과 연락을 취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러는 사이 1923년 1월 12일 김상옥(金相玉)의사의 ‘종로경찰서 투탄의거’가 일어나고 김한이 이에 연루되어 붙잡히자, 2월 1일 서울을 빠져나와 톈진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에 김원봉은 김한을 대신하여 김시현(金始顯)에게 폭탄 반입공작을 추진토록 지시하였다. 김시현은 조선일보 안동지국장 홍종우(洪鍾祐)와 봉천지국장 신명구(申明九) 등을 만난 다음, 서울에서 뒤따라 온 이현준(李賢俊)과 함께 톈진으로 가서 김원봉과 만나 폭탄 반입에 관해 의논하였다. 이때 경기도경찰부 황옥(黃鈺) 경부(警部)가 김상옥의거의 수사를 위해 1923년 2월 8일 톈진으로 출발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김시현은 황옥을 폭탄의 국내 반입 계획에 가담시키기로 하고, 2월 9일 안동현으로 가서 홍종우로부터 소개받은 조선일보 평북지국원 백영무(白英武)를 대동하고 톈진으로 돌아와, 황옥의 도착을 기다렸다.

황옥이 톈진에 도착하자 이때 그를 맞이해 김원봉을 만나게 하였고, 황옥은 의열단의 폭탄 국내반입 계획에 가담하는 데에 동의하였다. 이에 황옥과 동행한 의열단원 유석현(劉錫鉉)을 데리고 상하이로 가서, 함께 폭탄을 톈진으로 운반해 왔다. 그리고 일행보다 먼저 톈진을 떠나 안동현으로 가 뒤이어 운반될 폭탄과 무기의 안전, 보관장소를 점검하였다.

1923년 3월 4일 백영무와 이현준은 열차편으로 안동현의 홍종우 집으로 폭탄을 운반하였고, 황옥과 김시현도 3월 7일 안동현에 도착하였다. 이때 유석현을 통해, 이륭양행(怡隆洋行)에 보관시켜 둔 폭탄과 무기를 황옥에게 건네주라는 김원봉의 명령을 전해 받았다. 그리하여 이륭양행의 주인 쇼우로 부터 이륭양행에 맡겨둔 폭탄과 무기를 찾아 황옥에게 인도하였다. 그리고 황옥·유석현·박기홍과 함께 일제 안동영사(安東領事) 김우영(金雨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후 이들은 3월 8일과 9일 양일간에 걸쳐 폭탄을 신의주의 백영무 집으로 운반하였고, 그 뒤 황옥과 유석현이 먼저 폭탄의 일부를 휴대하고 3월 11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폭탄은 김사용(金思容)과 조황(趙晃)에게 숨겨두고, 15일에는 이경희(李慶熙)로 하여금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는 문건을 각 도지사와 경찰부에 우송토록 명령하였다.

김시현은 김태규(金泰奎)와 함께 3월 11일 폭탄 중 일부를 시내 효자동 21번지 조황에게 우송한 뒤, 12일 나머지 폭탄을 조동근(趙東根)에게 맡긴 다음, 13일 서울에 도착, 조황의 집에 잠복하였다.

그러나 3월 15일에는 김시현·황옥 등이, 3월 24일에는 홍종우 등이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조선총독부 안동영사와 경기도경찰부 경부 등이 연루된 의열단의 폭탄 국내반입 활동이 발각되고 말았다.

한편 서울로 잠입한 뒤 폭파 대상으로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일본인 전기회사 등을 물색한 뒤, 거사에 필요한 경비를 확보하기 위해 유석현과 함께 자금모금에 나섰다. 그러나 폭탄의 운송이 지연되고 거사가 어렵게 되자 독자적인 추진을 시도하였다. 황금정 2정목(현 을지로 2가)에 있는 정목여관(正木旅館)에 머물면서, 권동산(權東山)·윤병하(尹秉夏)·유시태(柳時泰) 등과 운동자금을 조달키 위해 내자동에 거주하는 친일 부호 이인희(李麟熙)를 찾아가 ‘임정 군무총장’을 자칭하고 5천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인희는 자금 마련을 위해 며칠간 시간을 할애해 줄 것을 요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1923년 3월 3일 오전 9시 자금 수령을 위해 이인희의 집을 방문하였다가 잠복해 있던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이어 동지들도 체포되면서 예심에 회부되었다. 1923년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0년 풀려난 뒤 톈진으로 망명해 병원을 운영하는 등, 한인사회의 중심 인물로서 천진한인교민회(天津韓人僑民會)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천진한인교민회는 의열단의 연락 거점 역할을 하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톈진 거주 한인들을 귀국시키기 위해 진력한 다음, 1946년 마지막 귀국 선편으로 돌아왔다.

광복 이후 고려동지회(高麗同志會)에 가입 정부수립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국내에 경제적 기반이 전무한 동지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상하이에서 남정각(1921) [판형1]

 

의열단원 김시현과 함께한 남정각(1929, 가운데) [판형1]

 

⋮한상도⋮

|참고문헌|

『매일신보』, 1923. 3. 8·9 ; 慶尙北道警察部,『高等警察要史』, 1934(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국역 고등경찰요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3, 2010)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백양사, 1947 ; 류자명, 『나의 회억』, 료녕인민출판사, 1984 ; 류자명, 『한 혁명자의 수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9.
  • 남정각_profile
  • 상하이에서 남정각(1921)
  • 의열단원 김시현과 함께한 남정각(1929, 가운데)
  • 1. 남정각 사진
  • 2. 남정각 사진(말년)
  • 3. 남정각 사진(말년)
  • 4. 남정각 상해에서(1921)
  • 5. 남정각과 동지들
  • 6. 남정각과 친구(1929)
  • 7. 남정각과 친구
  • 8. 거사전 서울에서 남정각과 동지들(1922)
  • 9. 의열단원 김시현과 함께한 남정각(1929)
  • 10. 남정각 출옥 환영회 기념(1929)
  • 11. 남정각 의사 유허비(갈담리)
  • 12. 남정각사건 보도기사(1923.4.12)
  • 13. 남정각묘(국립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