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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민양기 閔良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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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민양기
한자명 閔良基
본 관  
이 명  
출신지 황해 해주(海州)
생몰년월일 1899. 3. 17 ~ 1922. 2. 25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대한독립단, 구월산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대한독립단 가입, 1920년 일본인 순사 모리모토와 친일군수 최병혁 처단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2)

1899년 3월 17일 황해도 해주군(海州郡) 천결면(泉決面) 좌랑리(佐郞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갔다. 서간도 콴뎬현(寬甸縣)에 도착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관남(寬南)지단장인 윤창수(尹昌洙, 尹昌壽)의 집에 머물렀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 경술국치 전후 만주로 건너온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의 인사들이 1919년 4월 15일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 본부를 만들며 성립한 군단이었다. 중앙본부에는 도총재부(都總裁部)와 총단(總團)이 설치되었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奎)였고, 총단의 단장은 조맹선, 부단장은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이 선임되었다.

대한독립단은 중앙본부 밑에 만주와 국내에 100여개가 넘는 지단(支團)을 설치하였다. 의병계열의 인사들이 만든 군단이었기에 국내 여러 지역에 연고가 많아 국내 지단 설립이 가능했고, 만주의 경우는 망명 초기부터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의 단체를 만들어 서간도 곳곳에서 이주 한인을 위한 자치 활동을 전개했기에 가능하였다. 중앙본부 간부들 대부분이 보약사를 비롯한 이들 자치 단체를 이끌며 각 지역에서 독립군기지를 구축하다가 힘을 합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대한독립단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이들 자치단체를 이끌던 인사들이 중앙본부로 떠나자 윤창수와 같은 인물들이 그 지역에 지단을 설립해 본부와 연락을 취하며 활동하였다.

지단장인 윤창수의 집에 머무는 기간인 1919년 9월경 대한독립단 콴뎬현 지단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중앙본부에서 파견돼 역시 지단장 윤창수의 집에 머물고 있던 황해도 출신 이명서(李明瑞)와 가까워 졌다. 이명서는 신민회(新民會) 주도로 독립군기지 개척이 시작된 1910년 전후부터 서간도로 넘어와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1920년 7월 하순 두 사람은 대한독립단 교통부장인 양기하(梁基瑕)를 찾아갔다. 양기하는 두 사람에게 이근영(李根永)·박기수(朴基洙)·이지표(李芝杓)·고두환(高斗煥)·주의환(朱義煥)·원사현(元士賢) 등 6명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국내로 진입해 일제 기관과 수뇌·친일 밀정 등을 척결할 것과 군자금을 모금해 올 것을 명령하였다. 8명으로 유격대를 조직하고, 이명서를 대장에 임명하였다.

이명서를 비롯한 8명의 대원들은 8월 초 압록강을 건너 삭주군에 도착하였다. 8월 7일 밤 9시경, 유격대는 평남 대동군을 통과하다가 자신들을 불심검문하려는 일본인 순사를 이지표와 함께 총격을 가해 처단하였다.

첫 거사를 마친 유격대는 계속 길을 재촉해 황해도 은율군으로 갔다. 그 곳에서 국내 지단원인 이수영(李壽泳)·이성룡(李成龍)·이항진(李恒鎭) 등을 소집하고, 김난섭(金蘭燮)·홍원택(洪元澤)·박능묵(朴能默)·박형진(朴炯鎭)·이현규(李鉉奎) 등을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리고 이들과 만주에서 온 대원들을 합해 유격대의 명칭을 구월산대(九月山隊)로 정하였다.

구월산대는 황해도 은율군에서 일제에 충성을 다하면서 동포를 착취하기로 유명한 친일군수 최병혁(崔炳赫)과 일제로부터 참사(參事)의 직을 받아 호의호식하며 악행을 일삼는 친일분자 고학윤(高學倫)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이 둘의 집은 한마을에 있어 함께 처단하기가 용의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거사 일을 1920년 8월 15일 밤으로 정하고, 대장 이명서는 성공적인 작전수행을 위해 대원들을 4개조로 편성해 역할을 분담시켰다. 최병혁의 집을 기습할 이지표와 홍원택의 제1조, 고학윤의 집을 습격할 고두환과 김난섭의 제2조, 최병혁과 고학윤을 처단할 시 일어난 소요를 듣고 주재소에서 몰려오는 일본 경찰을 방어할 대장 이명서가 이끄는 제3조, 그리고 나머지 대원들은 제4조에 편성되었다. 이때 제4조에 편성되어 3개 조의 대원들이 작전을 마치고 철수할 때 이를 엄호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1조 대원들이 담을 넘어 방안에 있던 최병혁에게 총격을 가해 처단하였다. 거의 동시에 2조 대원들도 고학윤의 집으로 가 그를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눈치 채고 달아나는 바람에 총성만 울리고 말았다. 두 집에서 총성이 울리자 주재소에서 일본 경찰이 몰려 나왔다. 3조가 일본 경찰에게 총격을 가해 1,2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고 일본 경찰이 주춤한 틈을 타 3개조가 동시에 사전에 약속한 철수 방향으로 뛰었다. 이어 제4조의 대원들이 철수하는 대원들의 뒤를 좆는 일본 경찰을 향해 일제히 엄호 사격을 가하였다. 상황을 파악한 일본 경찰은 도주하였다. 처음 목적한 고학윤은 처단하지 못하였으나 구월산대의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작전을 끝낸 구월산대는 은율군 남부면(南部面) 개원리(開元里)에 있는 지단원의 집으로 갔다. 그 곳에서 잠시 머무르며 다음 일정을 논의하였다. 구월산대의 이 같은 활동이 있자 일제의 황해도 경찰부는 전 경찰력을 동원해 도내를 구석구석 수색하였다. 하지만 구월산대 대원들이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신천(信川)·송화(松禾)·해주(海州) 등으로 이동하며 외진 곳에 위치한 지단원의 집을 순회한 까닭에 단서를 잡지 못하였다.

9월 초에 다시 구월산 방면으로 이동해 신천군 초리면 도명리(草里面 道明里)에 있는 지단원 노성우(盧聖祐)의 집에 머물렀다. 이 집은 구월산록에 위치해 있어 일본 경찰대의 공격을 받더라도 산속으로 들어 가 유격전을 펼치기가 용의했기 때문이었다. 또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집주인 노성우는 산 밑에 거주하는 우종서(禹鍾瑞)라는 인물에게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즉시 연락하도록 조치를 해 두었다. 그러나 일본 사복 경찰의 계략에 넘어간 우종서가 구월산대의 위치를 발설하고 말아 노성우의 집은 일본 경찰로 포위되고 말았다. 결국 구월산대와 일본 경찰 간에 장시간에 걸친 공방전이 펼쳐졌다. 일본 경찰 20여 명이 쓰러졌다. 그러나 구월산대도 대장 이명서를 비롯해 박기수·주의환·원사현·이지표·이근영 등이 전사하고, 남은 대원은 붙잡히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총알 2발을 맞고 의식을 잃은 채 달구지에 실려 송화경찰서로 끌려갔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다가 10여 일 후 다시 달구지에 실려 해주감옥으로 압송되었다.

1921년 8월 19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받았다. 1920년 8월 7일 평남 대동군을 통과할 시 일본인 순사를 총으로 저격해 죽인 것이 사형의 가장 큰 이유였다. 1921년 11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1922년 2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어, 2월 25일 평양감옥에서 형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참고문헌|

『독립신문』, 1921. 12. 26 ; 『동아일보』, 1921. 8. 20 ;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 27, 東京: みすず書房, 197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5권, 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4, 1978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애국동지원호회, 1956 ; 채영국, 「3·1운동 이후 서간도지역 독립군단연구」, 『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지식산업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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