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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형건 金亨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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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형건
한자명 金亨鍵
본 관 전주(全州)
이 명 김형권(金亨權)
출신지 평안남도 대동(大同)
생몰년월일 1905. 10. 4 ~ 1934. 5. 5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국민부, 조선혁명군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만주로 이주하여 1930년 국민부에 가입해 조선혁명군에서 활동하다가 8월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일제 경찰 처단
포상훈격(연도) 애국장(2010)

1905년 10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에서 상민(常民) 김보현(金輔鉉)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이명은 형권(亨權)으로 직업은 한의사였다. 1930년대 만주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부(國民府)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에 가담했던 김형직(金亨稷)이 5월 압록강 건너 대안(對岸)의 린장현(臨江縣)으로 이주하자, 그를 따라 함께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에 한의사를 하던 김형직이 사망하자 병원을 물려받아 운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독립운동 당시의 주소는 안투현(安圖縣) 가대서리(街大西里)이다.

 

1930년 3월 지린성(吉林省) 안투현(安圖縣), 같은 해 (음)6월, 창바이현(長白縣) 등에서 민족진영의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특무 제2대장 최병일(崔秉一, 이명 (金哲))의 권유로 군사부에 가입하였다. 국민부는 만주지역 민족유일당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협의회파에 가담했던 정의부(正義府) 다수파와 신민부(新民府) 민정파, 참의부(參議府) 일부의 민족주의자들이 1929년 4월 지린(吉林)에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였다. 중앙집행위원장에 현익철(玄益哲)과 군사부장 이웅(李雄)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본부는 흥경(興京)에 있었으며, 별도의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이 항일무장투쟁에 주력하였다. 초기의 사령관은 이웅(李雄)·양세봉(梁世鳳) 등이 활약하였다.

 

이때 국민부 내에서 국민부에 반대하는 반국민부파에 속해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국민부파는 국민부와의 갈등 속에서 1930년 7월 조선혁명군의 중대장 출신 이종락(李鍾洛)이 조직한 조선혁명군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吉江指揮部)라는 별도의 조직을 결성하였으며, 조선혁명군사령부·세화군(世火軍)·동방혁명군(東方革命軍) 등으로 그 명칭을 변경해 가며 활동하였다. 일제는 이들에 대해 민족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3세력의 단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1930년 8월 최병일로부터 국내로 들어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라는 명령과 함께 권총 1정, 탄약 200발과 함께 약간의 여비를 받았으며, 최효일(崔孝一)·박차석(朴且石)과 함께 파견되었다. 이들은 창바이현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로 들어왔다. 이후 풍산군(豊山郡) 안산면(安山面) 내중리(內中里) 부근에서 기회를 엿보던 중, 이들을 심문하려던 풍산경찰서 순사부장(巡査部長) 마츠야마(松山猪三)를 처단하였다. 그리고 자전거와 약간의 자금을 확보하여 현장을 빠져 나갔다. 도주 중 후치령(厚峙嶺)에서는 자동차에 타고 있던 순사의 권총을 탈취하였다. 같은 해 9월 3일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작전으로 홍원(洪源)에서 붙잡힐 당시, 순사에게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1932년 4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살인미수와 강도 등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1934년 5월 5일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형건 재판 보도 기사(『매일신보』 1932. 3. 30) [판형1]

 

⋮황민호⋮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32. 4. 4 ; 「신분장지문원지」, 경찰청 ; 「朴且石 가출옥관계서류」, 평양형무소, 1937. 11. 24 ; 『동아일보』, 1932. 3. 8 ; 『조선일보』, 1932. 3. 8 ; 『중앙일보』, 1932. 3. 8.
  • 김형건 재판 보도 기사(『매일신보』 1932.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