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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박계양 朴啓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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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박계양
한자명 朴啓陽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북 영주(榮州)
생몰년월일 1888. 4. 28 ~ 1937. 12. 17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신간회 영주지회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경북 영주에서 「혁신공보」라는 선전물 제작, 1927~28년 신간회 영주지회 간부 활동
포상훈격(연도) 건국포장(2009)

1888년 4월 28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영주면 고현리(古峴里)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19년 (음)8월경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귀국한 정응봉(鄭應鳳)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자금을 거두어 임시정부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그 해 11월 15일, 정응봉의 매형 신철균(申喆均)의 경북 문경군(聞慶郡) 농암면(籠巖面) 율수리(栗藪里) 집에서 정응봉·류종렬(柳宗烈)과 함께 민심 고취와 의연촉구용 독립운동 선전물을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제호로 16매 작성하여 각 면사무소에 우송하고 시장 등지에 부착하려 하였다. “조선에 와 있는 미국인 목사와 영국인 선교사가 워싱턴에 가서 윌슨 대통령을 만나 1919년 만세운동 때 일본의 야만적 참살 행동을 국제연맹 회의에서 문제 삼기로 하는 협의를 마쳤다”, “서울에서 독립만세 시위 중에 청년단에 체포된 형사 2명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일반 동지는 모두 마음을 하나로 하여 서로 알리고 깨우쳐줌으로써 권성(權聲)을 기다리도록 하자”라는 것이 선전물의 내용 요지였다.

그러나 이 기미를 알아챈 경찰이 출동 포위하고 급습함에 따라 「혁신공보」 제작 현장에서 붙잡혀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처분의 건’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20년 1월 2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징역 2년을 받았으나 항소하였다. 그 해 2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7년 8월 29일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 창립 때 조직선전부 총무 간사로 선임되었고, 그 해 12월의 제1회 대회에서 유임되었다. 1928년 3월 24일의 임시대회에서 정치문화부 총무간사로 직임을 옮겨 1929년 1월까지 유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1920. 1. 23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20. 2. 26 ; 권대웅 외, 「영주독립운동사」, 영주시·(사)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