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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곽민서 郭敏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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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곽민서
한자명 郭敏瑞
본 관  
이 명 창씨명 : 길촌태굉(吉村泰宏)
출신지 함경북도 경흥(慶興)
생몰년월일 1917. 2. 12 ~ 1968. 4. 10
운동계열 일본방면
관련 단체 친목회
관련 사건  
주요 활동 일제 말기 일본 도쿄 유학 시 비밀결사운동 참여
포상훈격(연도) 건국포장(1992)

1917년 2월 12일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웅기면(雄基面) 웅기리(雄基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길촌태굉(吉村泰宏)이다. 1934년 4월 함북 회령군(會寧郡)에 있는 회령상업학교(會寧商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0년대 후반 일본 도쿄로 유학하였으며, 회령 출신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인 친목회(親睦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9년 2월 도쿄 니혼대학(日本大學)에 다니면서 고학(苦學)하던 함북 회령 출신의 백신도(白信道) 등과 교류하면서 민족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39년 2월 하순부터 5월 중순 사이에 백신도·정재선(鄭宰善) 등과 함께 여러 차례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우리 민족은 광영 있는 전통을 지닌 우수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한일병합 이래 일본의 예속 아래서 자유와 행복을 빼앗기고 노예와 같은 생활을 계속해왔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일제의 식민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행복을 구하려면 민족이 독립하는 길밖에 없으며, 이를 완수하려면 청년 학도의 의식을 고양해야 한다고 협의하였다.

1940년 9월 중순부터 12월 중순 2016년 11월 19일 사이에도 백신도·정재선·김유진(金有璡)·박수섭(朴壽燮) 등과 함께 여러 차례 회합하였다. 이들은 일제가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취직 상의 불만, 일본 도항(渡航)의 불편, 의무교육의 불비(不備), 한국 농촌의 피폐, 특별지원병 제도 등 여러 차별 정책이 존재하는 기만적인 차별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이들은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연구를 깊이 해서 대중의 지도자가 될 인격·식견을 함양하여 민중의 독립 의식 고양을 꾀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 민족의 의식 고양과 장차 독립국가 건설에 필요한 여러 분야를 설정하여 서로 분담하여 민족 독립을 위한 실력 배양에 힘쓸 것을 결의하였다. 특히, 이들은 “중등교원이 되어 장래 특수대학을 창설하여 그 총장이 되어 인재 양성에 힘쓸 것” 등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백신도는 사회학·경제학·철학 분야 연구와 노동조합 운동을, 정재선은 종교 특히 기독교를 통한 독립 의식 고양을, 김유진과 박수섭은 법학 연구와 활동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역할 분담 아래 이들은 매월 1~2회 회합하여 지식을 교환하고 계몽 자료를 작성하였다.

또한, 이들은 이두균(李斗均)·김관춘(金寬春)·최태연(崔泰淵)·박용근(朴龍根)·나병진(羅炳鎭)·김택진(金澤鎭)·남정수(南貞守)·탁운학(卓雲鶴)·엄수경(嚴守景) 등 다수의 한국인 고학생 청년을 규합하여, 우리 민족의 현상을 설명하고 한국 청년은 독립 정신을 강고히 하여 독립을 위해 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10월경 우선 회령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친목회’를 조직하여 단결력을 강화하고 민족 의식을 고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도쿄나 회령에서 매월 1회 정도의 회합하면서 위인 전기를 읽고 토론하는 등 서로 독립을 위한 지도자가 되고자 자질을 연마하였다.

한편, 백신도를 중심으로 한 친목회 활동의 영향으로, 신문 배달을 하면서 센슈대학(專修大學)에 다니던 고학생 현창석(玄昌錫) 등이 중심이 되어 1941년 11월 정식으로 ‘우리조선독립운동그룹’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이 그룹은 무장봉기의 준비를 위해 매우 세부적인 계획까지 수립하면서 활동하던 전시 체제기 일본 지역의 대표적인 비밀결사 가운데 하나다. 일제가 패망하는 결정적인 기회가 오면 국내와 일본이 서로 연계하여 민중봉기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처럼 친목회와 우리조선독립운동그룹이 함께 활동하던 중 1942년 3~4월경 현창석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로 인해 우리조선독립운동그룹은 물론 친목회에까지 여파가 미쳐서 결국 백신도·이두균·김관춘·최태연·박용근 등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행히 중국으로 피신하여 붙잡히지는 않았다. 이후 중국 동삼성(東三省) 목단강(牧丹江) 교외의 두도구(頭道溝)에 체류하다가 1945년 8·15 광복 이후 귀국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국도신문(國都新聞)』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참고문헌|

『매일신보』 1934.3.31 ; 『동아일보』 1968. 4.11 ; 『경향신문』 1968.4.11 ; 朴慶植 編, 『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 2·5, 1976 ; 明石博隆·松浦總三 編, 『昭和特高彈壓史』 8, 太平出版社, 1976 ; 『독립운동사자료집』 13, 별집3 ; 『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 10, 國家報勳處,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