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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화진 金華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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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화진
한자명 金華鎭
본 관  
이 명 김줄포(金茁浦)
출신지 경상북도 영주(榮州)
생몰년월일 1904. 10. 17 ~ 1946. 12. 22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신간회, 영주청년동맹, 영주적색농민조합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8년 영주청년동맹·신간회 영주지회 임원으로 활동하고 1932년 농민조합 담당자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5)

1904년 10월 17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평은면(平恩面) 수도리(水島里, 현 영주군 문수면 수도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줄포金茁浦를 사용하였다. 영주공립보통학교(榮州公立普通學校)를 중퇴한 후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 집행위원,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 집행위원, 영주농민조합(榮州農民組合)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영주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영주군에서 지역 청년들을 선도하기 위해 친일 어용 단체인 순흥청년회(順興靑年會)가 조직되자, 영주청년동맹에서는 이를 해체시키기 위해 1929년 4월 영주청년동맹 회관에서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그 방법을 협의하였다. 이때 교섭 위원 3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4월 27일 순흥청년회 총무의 집으로 가서 해체를 압박했는데, 이 사건으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곧바로 항소하였으나, 그 해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1931년에는 영주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김봉호(金鳳浩)·김계등(金季登)·박병성(朴炳星) 등과 함께 조직 결성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비밀결사인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榮州共産主義者協議會)를 조직하였다. 조직 내에서 적색농민조합 책임자 임무를 맡아 동지를 규합하는 등 조직 확장에 힘썼다. 그러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활동 초기 단계에서 경찰에 발각되어 와해되었다.

 

1932년 7월부터 관련자 검거가 시작되었고, 영주·봉화(奉化) 지역 적색농민조합 활동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형사부, 1930. 7. 9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30. 9. 11 ; 「수형인명부」 ; 「집행원부」 ; 「형사사건부」 ; 『조선일보』, 1930. 7. 13 ; 『동아일보』, 1932. 9. 20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경북독립운동사』 Ⅴ, 경상북도, 2014.
  • 1. 김화진 재소자신분카드
  • 2. 김화진 대구복심법원 판결문(1930.09.11)
  • 3. 김화진 관련 동아일보 기사(1932.08.02)
  • 4. 김화진 관련 동아일보 기사(1932.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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