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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희수 金熙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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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희수
한자명 金熙洙
본 관  
이 명  
출신지 제주
생몰년월일 1899. 6. 5 ~ 1985. 12. 3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제주 신좌면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제주 신좌면 조천리 만세시위 참여
포상훈격(연도) 대통령표창(2000)

1899년 6월 5일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현 제주특별자치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고, 신좌면 조천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신좌면 조천리에서 가장 먼저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조천의 유지였던 김시범(金時範)과 김시은(金時殷)은 1919년 3월 이래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시위운동이 발발하고 있음을 듣고, 제주도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3월 16일 서울에서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 4학년 학생이던 김시범의 조카 김장환(金章煥)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조천리로 귀향하여 시위 상황을 전하였다. 3월 17일 김시범, 김시은, 김장환은 조천리 미밋동산[(味毛峙)]에서 거사하기로 발의하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규합하였다. 이들은 동지로 고재륜(高載崙)·김경희(金慶熙)·김용찬(金容燦)·김형배(金瀅培)·이문천(李文千)·황진식(黃鎭式) 등을 규합하고 시위 계획에 동참케 하였다. 시위는 김시범의 큰 형 김시우(金時宇)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하였다. 또한 신촌리(新村里)와 함덕리(咸德里) 등 인근 마을과도 연락하여 사람들을 시위에 동참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3월 21일 오전 10시경 김용찬 등 수명과 함께 조천리 시장에 갔다가 김시범과 김시은을 만났고, 이들이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발의하자 이에 찬동하여 동참하였다. 오후 3시 무렵에는 미밋동산으로부터 5~6백여 명의 시위 대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조천 비석거리까지 행진하였다. 행진 도중에 신촌리에서 조천주재소와 제주경찰서에서 출동한 30여 명의 일제 경찰이 무력 진압에 나섰고, 현장에서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그 해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유지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판결문(대구복심법원,1919. 5. 29) [판형1]

 

⋮고태우⋮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5. 29 ; 「수형인명부」, 대구복심법원, 1919. 5. 29 ; 「집행원부」, 대구복심법원, 1919. 5. 2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金東栓, 「濟州人의 3·1運動과 그 영향」, 『耽羅文化』 16, 1996 ; 제주도지편찬위원회 편, 『濟州島誌』 제2권, 2006.
  • 판결문(대구복심법원,1919.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