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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형진 金亨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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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형진
한자명 金亨鎭
본 관  
이 명 김형진(金亨振), 김원명(金元明)
출신지 전라북도 완주(完州)
생몰년월일 1861. 7. 1 ~ 1898. 2. 27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김이언 의병부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895년 5월 김구와 함께 김이언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초산·위원 등지에서 의병활동 전개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861년 7월 1일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조촌면(助村面) 반월리(半月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다. 이명(異名)으로는 한자가 다른 김형진(金亨振)과 김원명(金元明)을 사용하였다.

 

1894년 김구(金九)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방법은 오직 무력투쟁뿐임을 결의하였다. 김구는 1893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로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해주성 전투에 참여한 바가 있었다. 김구가 안중근(安重根)의 부친인 안태훈(安泰勳)에 의탁하고 있던 중 만나 함께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무력투쟁을 위해 청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얻고자 김구와 함께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건너 청나라 선양(瀋陽)으로 가서 관동연왕(關東燕王) 이극강아(李克康阿)에게 원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린장(臨江), 환런(桓仁)을 거쳐 콴뎬(寬甸)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三道溝)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3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金利彦)을 찾아가 김구와 함께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김이언 의병부대와 함께 초산(楚山)·위원(渭原) 등지에서 포수(砲手)를 모집하여 전력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강계군(江界郡) 고산리(高山里)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이를 의병들에게 지급하였다. 1895년 음력 11월 초 고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그 여세를 몰아 강계성을 공격하였으나, 공성(攻城) 작전에 실패하였다. 강계성 공략에 실패한 이후 김구는 1896년 3월 8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에서 배를 타고 인접한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치하포(鵄河浦)에 머물던 중 일본 상인 츠치다 죠스케(土田讓亮)를 처단하였다. 치하포 사건으로 김구는 해주에서 붙잡혔으며, 조사 과정에서 츠치다 살해 동기는 ‘국모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치하포 사건으로 체포령이 떨어졌으나, 몸을 피해 전라북도 금구(金溝)로 돌아갔다. 금구에서 머물고 있다가 1898년 2월 27일 동학 접주가 되어 포교활동 등을 하던 중 붙잡혀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참고문헌|

「海州府觀察使署理海州府參書官金孝益報告」, 1896. 6. 30,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 의병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 「동학접주발령장」 ; 金亨鎭, 「路程略記」, 『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 18, 1996 ; 도진순 탈초 교감, 『정본 백범일지』 돌베개,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