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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태용 金泰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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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태용
한자명 金泰鏞
본 관  
이 명  
출신지 평안남도 중화(中和)
생몰년월일 1884. 9. 30 ~ 미상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독립청년단
관련 사건  
주요 활동 독립청년단 총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 송부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14)

1884년 9월 30일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중화면(中和面) 낙민리(樂民里)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같은 면 석전리(石磚里) 55번지에 거주하였다.

 

1920년 9월 6일 곽익호(郭益浩)를 비롯한 여러 명의 동지들과 함께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문정면(文井面) 어수리(御水里)에 살고 있는 곽익호의 집에서 회합하였다. 이때 이들은 독립 달성을 목적으로 한 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 청년단의 목적은 첫째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부할 것, 둘째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한인 경찰, 관리, 밀정을 살해할 것, 셋째 한인으로서 요구받은 독립운동 자금의 제공을 거부하거나 독립운동자를 관에 밀고하는 자를 살해할 것, 넷째 조선 내의 독립운동의 상황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할 것, 다섯째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운동 선전 인쇄물을 일반 조선인에게 배포하여 해당 사상을 선전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결의한 후 각자의 직무를 나누었는데, 김청풍과 함께 총무를 맡게 되었다.

 

1920년 7월 20일 집에서 신표성(愼表晟)·김치은 등과 회합한 뒤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김치은과 함께 신표성이 손재흥에게 제공한 현금 500원과 김사인(金史人)이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 200원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기 위해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위북면(威北面) 북하동(北下洞) 도선장(渡船場)에서 기다리고 있는 임시정부 파견원 최명식(崔明植)에게 전달할 것을 명령받고 이를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동지들과 함께 이 돈을 가지고 1920년 8월 1일 의주군 의주면(義州面)에 도착하였으나 최명식과 만나기 전에 붙잡혔다.

 

192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200일 본형산입)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8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을경⋮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1. 5. 17 ; 『매일신보』, 1921. 1. 15, 3. 24, 4. 28, 8. 3 ; 『동아일보』, 1921. 5. 18, 6. 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9,1975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32·33, 1998·1998.
  • 1. 김태용 경성복심법원 판결문(1921.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