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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진효 金鎭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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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진효
한자명 金鎭孝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청도(淸道)
생몰년월일 1887. 11. 17 ~ 1978. 9. 5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청도군 문면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 만세시위 참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87년 11월 17일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운문면(雲門面) 공암리(孔巖里)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하고 1919년 당시 문명학교(文明學校)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운문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0일에 문명학교 졸업생 김종태(金鍾台)와 재학생 김상구(金相久)가 시위계획에 합의하면서 시작되었다. 3월 15일에는 김재화(金在華)와 손기현(孫琪鉉) 등이 “우리 동포 형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 리 강토를 탈환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여 운문면 내 곳곳에 붙였다.

 

3월 17일에 김상구·손한조(孫漢祚)·김용구(金龍久) 등과 함께 문명학교에서 만세시위를 다짐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8일에 주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경찰에 소환되어 격문에 대한 취조를 받았다. 귀가하는 길에 주도자들과 함께 곧바로 시위를 단행하기로 결의하면서 “면사무소에 가서 깃발을 만들어 만세를 부르면 마을 주민도 나올 것”이라고 독려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하자 일행 중 김종태가 먼저 2척 길이의 명주 수건에 ‘(大)’를 적어 깃발을 만들었다. 이때 4명의 면서기에게 ‘(韓)’, ‘(獨)’, ‘(立)’, ‘(萬)’을 쓰도록 종용하였다. 이후 누군가가 ‘(歲)’를 적음으로써 「대한독립만세」 깃발이 완성되었고, 이에 곧바로 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위를 이끌었다.

 

이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3월 20일 일본헌병과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여 그 해 7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1년에 문명학교 교장 김우곤 등과 군자금 700원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유고집 『구산소감(九汕所感)』, 『대한의열록(大韓義烈錄)』, 『규윤문보감(閨閏門寶鑑)』 등을 저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진효가 교사로 활동한 문명학교 터(현 3·18독립운동기념관) [판형1]

 

⋮박준형⋮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 5. 2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7. 5 ; 「판결문」, 고등법원, 1919. 9. 25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운동Ⅱ- 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 김희곤 외, 『경북독립운동사Ⅲ- 3·1운동』, 경상북도, 2013 ; 권대웅, 「청도군의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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