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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택영 金澤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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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택영
한자명 金澤榮
본 관 화개(花開)
이 명 자 : 우림(于霖), 호 : 창강(滄江), 소호당주인(韶護堂主人)
출신지 경기도 개성(開城)
생몰년월일 1850. 10. 15 ~ 1927. 3. 27
운동계열 계몽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0년 「오호부(嗚呼賦)」 저술, 1911년 󰡔매천집(梅泉集)󰡕 간행, 1916~1924년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한사경(韓史綮)󰡕,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 󰡔신고려사(新高麗史)󰡕 등을 저술·간행
포상훈격(연도) 애국장(2018)

1850년 10월 15일 경기도 개성부(開城府) 자남산(子南山)에서 개성부 분감역(分監役) 김익복(金益福)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윤희락(尹禧樂)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화개(花開)이고 자(字)는 우림(于霖), 호(號)는 창강(滄江), 운산소호당주인(雲山韶護堂主人)이다. 한말의 독립운동가인 강위(姜瑋), 황현(黃玹) 등과 대표적인 3대 시인이라고 칭송되었다.

 

1866년에 성균관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다. 1873년 견산당(見山堂)을 방문해 기문을 지어준 교리(校理) 이건창(李建昌)과 교류하면서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건창으로부터 “고려 유민인 일사(逸士)의 아취(雅趣)가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1882년 김윤식(金允植)을 통해 중국의 문인인 장건(張騫)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중국에도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1891년 성균관 진사회시(進士會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894년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에 중추원참서관 겸 내각참서관(中樞院參書官兼內閣參書官)에 임명되었다. 1903년에 통신사 전화과 주사에 임명되었으며, 문헌통고속찬위원(文獻通考續撰委員)이 되었다. 1905년 6품의 품계로 학부 편집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처자를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해임되었으며, 동시에 문헌비고찬집소 위원(文獻備考纂輯所委員)에서도 해임되었다. 다만 고종이 1907년 문헌비고찬집소의 관원에게 시상할 때 정3품의 관원으로 포함되어 있어서 실제로 1905년에 해임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장건의 도움으로 중국 장쑤성(江蘇省) 양자강 하류인 남통주(南通州), 오늘날 상하이(上海)시의 북쪽에 정착하여 장건이 세운 한묵림인서국(翰墨林印書局)에서 일하였다. 1910년 망국의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소복을 입고 곡을 하였다. 이후 「오호부(嗚呼賦)」를 지어 망국의 한을 표출하였다. 「오호부」에서 “동풍이 매섭게 불어 바닷물이 육지를 덮고 인왕산이 뿌리째 뽑혔다. 이제 기자의 제사를 어느 민족이 계속해줄 것인가”라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을 탄식하였다. 그 해 황현이 자결하자 1911년에 『매천집(梅泉集)』을 간행하였다.

 

중국에서 거주하면서 역사 서술을 통해 한국사를 주체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도록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1916년), 『한사경(韓史綮)』(1918년),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1922년), 『신고려사(新高麗史)』(1924년) 등의 한국사 서적을 다수 집필하였고 그 서적들은 한묵림인서국에서 출판되었다.

 

『한사경』은 한국의 독립에 관련된 역사서를 서술한 것 중에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 역사적 원인을 설명한 책이다. 조선 왕조의 건국 과정, 국왕의 실정, 부도덕 등을 망국의 원인으로 보고 비판하였다. 1913년에 처음 간행한 『한사경』은 조선시대사가 근간이었으며, 태조부터 양제(讓帝)까지 23대왕, 2제, 2폐주(廢主) 도합 519년의 역사를 6권으로 정리하였다. 초기에는 『대동기년(大東紀年)』,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매천야록(梅泉野錄)』 등에만 근거하여 서술하였기 때문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당의통략(黨議通略)』, 『산제징신록(山齋微信錄)』 등의 자료를 보충하여 1918년 한묵림인서국에서 재차 간행하였다.

 

『한사경』에는 총 50편의 사론(史論)이 실려 있다. 특히 조선 왕조 정치계의 4당분위(四黨分位)를 개탄하며 당쟁의 기원과 경과 및 폐단에 대해 기술하고, 당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의 시비도 설명하였다. 박지원의 『연암집』을 재편한 『중편연암집(重編燕巖集)』의 주(注)에서도 노론(老論)·소론(小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사색당파(四色黨派)를 비난하였다. 이러한 『한사경』의 조선 왕조사 포폄을 둘러싸고 1923년에 유림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당시 유림의 대표인 유림총부(儒林總部)와 태극교본부(太極敎本部)가 『한사경』을 비난하는 『한사경변(韓史綮辨)』을 간행하였다.

 

『한국역대소사』에서는 단군(檀君)·기자(箕子)·마한(馬韓)·삼국(三國)·통일신라로 이어지는 역사 체계를 구성하고, 발해사를 서술하여 고대사 체계를 정리하였다. 특히 강역을 중시하여 정약용(丁若鏞)의 『강역고(疆域考)』와 유득공(柳得恭)의 『사군지(四郡志)』에 근거하여 고증하였고, 일본사를 참고하여 대외관계사 부분도 정리하였다.

 

『신고려사』에서는 고려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서술하려고 시도하였다. 특히 『고려사』의 「세가(世家)」를 「본기(本紀)」로 하였고, 고려의 유민에 대해 별도로 서술하였다. 또한 사건을 서술할 때 찬(贊)을 통해 사건의 성패 원인을 실증적·객관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이외에도 대표적인 편찬서로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가 있다. 고려와 조선의 문장가 9인을 선정하고 그들의 대표적인 산문을 선별하여 정리한 책이다. 선정한 9인은 김부식(金富軾)·이제현(李齊賢)·장유(張維)·이식(李植)·김창협(金昌協)·박지원(朴趾源)·홍석주(洪奭周)·김매순(金邁淳)·이건창(李建昌)이다. 1921년에 그의 제자 왕성순(王性淳)이 스승의 문장까지 덧붙여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로 간행하였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가 상해정변을 일으켜 중국의 정치 상황이 혼란해지자 독립 가능성을 비관하였다. 같은 해 3월 30일 중국 장쑤성 남통주에서 아편으로 음독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왕무⋮

|참고문헌|

『순종실록부록』 ; 『승정원일기』 ; 『麗韓九家文鈔』 제10권, 韓李寧齋文, 견산당기 ; 김택영, 『金氏史補』, 1883 ; 김택영, 『合刊韶濩堂集定本』, 翰墨林印書局, 1922 ; 『동아일보』, 1927. 4. 5 ; 『마산일보』 1958. 6. 16 ; 최혜주, 『창강 김택영의 한국사론』, 한울, 1996 ; 최혜주, 「滄江 金澤榮 硏究」, 『한국사연구』 35, 1981 ; 최혜주, 「1920년대 김택영의 중국에서의 한국사 서술」, 『사학연구』 53, 1997 ; 이용식, 「김택영의 신고려사에 대한 일 고찰」, 『계명사학』 11, 2000 ; 황재문, 「전통적 지식인의 망국 인식 : 김윤식, 김택영, 박은식의 경우」, 『한국문화』 52, 2010 ; 이계형, 「『매천야록』 의 사료적 가치의 재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7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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