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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탁원 金鐸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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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탁원
한자명 金鐸遠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대구(大邱)
생몰년월일 1898. 7. 16 ~ 1940. 3. 14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신간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소년총연맹, 한성의사회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학생시위 주도, 1927년 신간회 집행위원, 1931년 조선물산장려회 상무위원, 1933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 설립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07)

1898년 7월 16일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동성동(東城洞)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상경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를 다니던 중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에 크게 고무되어, 이에 호응하는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 등 각 학교 학생들은 1919년 2월 20일경부터 회합을 갖고 시위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2월 26일 정동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 집에서 회합을 갖고 시위운동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때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완수를 결의하였다. “평화적 수단으로 일본에 독립을 요구하고, 만약 일본이 이를 허용치 않는다면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킬 수단을 강구하겠다”라는 생각으로 독립 방략을 세우고, 만세시위를 결행하였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으면서도 “참정권을 비롯하여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도 인정치 않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불평등하다”라며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다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월(미결구류 160일 통산)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東京)제국대학 의학부에서 2년간 병리학을 연구하다가 1926년 귀국하여 병원을 열었다. 의사로서 옥고를 겪은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하는 한편, 1927년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집행위원과 회계를 맡아 보았으며, 1931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 상무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단체를 조직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조선소년총연맹(朝鮮少年總聯盟) 특별위원으로 있으며 아동들에 대한 심리 치료를 연구하였으며, 조선나병환자구제연구회(朝鮮癩病患者救濟硏究會) 상무위원 등으로 일하며 열악한 한국의 보건·의료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관헌의 단속과 수해 등으로 실의에 빠진 만주 동포를 구제하고자 만주도포문제연구회(滿洲同胞問題硏究會)를 조직하여 위문품을 전달하고, 순회 치료를 하는 등 재외동포 구제에도 앞장섰다.

 

한성병원(漢城病院)·경성의학강습소 등을 운영하고, 한성의사회장을 맡는 등 한국 의료계를 주도하였다. 1933년에는 미국인 의사 로제타 홀 여사가 운영하던 유일한 여자의사교육기관 조선여의강습소를 인수하여 부인 길정희와 함께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후일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 발전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황선익⋮

|참고문헌|

『동아일보』, 1932. 1. 28, 2. 16·19, 4. 17·23, 1933. 8. 9, 1940. 3. 17 ; 『조선중앙일보』, 1934. 4. 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13, 1972·1977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4, 1991 ; Kim Sangduk, 『The Major Achievements of Dr. Kim Taik-Won』, 한림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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