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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초암 金初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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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초암
한자명 金初岩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라남도 여수(麗水)
생몰년월일 1916. 5. 12 ~ 1958. 7. 14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42년 민족의식 고취
포상훈격(연도) 건국포장(2011)

1916년 5월 12일 전라남도 여수군(麗水郡, 현 여수시) 동정(東町)에서 태어났다. 창씨명은 금산초암(金山初岩)이다. 방직공장 직공으로 일하던 중, 징병제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1년 3월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일보 여수지국 배달원, 여수 남면 화태~여수간 연락선 매표원, 여수항 방파제 공사장 인부, 여수우편국 우편배달부, 종연방직 전남공장 직공 등으로 일하였다.

 

1942년 여수우편국 우편배달부로 근무하던 중 2월 14일 정오경 배달부 대기실에서 신정귀금(新井貴金) 등 2명의 동료에게 “일급 1원 20전으로 먹고 살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인들의 일은 매우 어려우나 급료는 적고, 또 좋은 자리에도 올라갈 수 없다.”라고 하여 일본인에 비해 한국인의 처우가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같은 해 4월 중순경 자신의 집 마루에서 여수우편국 간이보험 모집원 송원홍(松原弘) 등에게 “조선인은 매일 열심히 일해도 급료는 적고 지위도 보장되지 않는다. 더러운 세상이다”라고 하여 전시체제기 한국인 차별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식민지 체제의 부당함을 피력하였다.

 

1942년 5월 1일부터 전남 광주에 위치한 종연방직(鐘淵紡織) 전남공장 직공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에 징병제도가 실시되는 것을 알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해 잡지 『조광(朝光)』 5월호에 실린 이창수(李昌洙)의 「몽상의 제2전선, 미영(米英)의 제2전선」이라는 글을 읽고 징병제도에 대해 더욱 반감을 갖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30일 공장 기숙사 사감 강본조부(岡本照夫)가 징병제도 실시에 대한 감상문을 쓰게 하자 다음날 31일 오후 7시경 화촌대남(和村大男)이라는 가명으로 “아! 하늘이여, 우리 조선 민족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조선이 일본과 합병된 이래 30년간 대화(大和)민족(필자 역 : 일본)의 무력에 두려워 굴복해 왔다. 이번 징병제도에 대해 나는 특별히 불만을 느낀다. 대화민족은 조선청년의 목을 왜 요구하는가? 내가 만일 징병검사에 합격한다면 대화민족을 한 사람씩 사살할 것이다”라는 징병제도 반대의견서를 기숙사 사감의 책상 위에 놓아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였다. 이를 통해 징병제도가 한국인의 목숨을 요구하는 부당한 것임을 알리고 강력히 비판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42년 9월 1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참고문헌|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42. 9. 14 ; 경찰청, 「신분장지문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