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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재계 金在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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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재계
한자명 金在桂
본 관  
이 명 호 : 성암(聲庵)
출신지 전라남도 장흥(長興)
생몰년월일 1888. 4. 25 ~ 1940. 6. 27
운동계열 문화운동
관련 단체 천도교
관련 사건 3.1운동, 멸왜기도사건(무인독립운동)
주요 활동 1919년 천도교 간부로 장흥 만세운동 주도, 1933년 「멸왜기도문」을 작성하고 천도교도 대상으로 배포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1)

1888년 4월 25일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대덕면(大德面) 신상리(新上里, 현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에서 동학교도인 김규현(金奎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성암(聲庵)이다. 어려서 한문을 익힌 뒤 15세에 천도교에 입문하였다. 17세 때 손병희(孫秉熙)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던 중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6년 강봉수(姜琫秀)·윤세현(尹世顯) 등과 함께 장흥에 천도교당(天道敎堂)을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금하여 교당을 개설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때 여비로 조달하였다. 이후 천도교 장흥교구(長興敎區)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고,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장흥군 교구장(敎區長)으로 있었다.

 

1919년 3월 6일 교구장으로서 장흥군 내 천도교도에게 49일 기도를 하게 하여 독립운동 자금 500원을 모금하였다.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이를 서울의 천도교중앙총부(天道敎中央總部)로 보냈다 아울러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장흥군을 비롯해 인접한 강진군(康津郡) 교구의 송화전(宋化田) 등에게 배부하였다. 곧바로 장흥교구 직원 김재반(金在班)·황생주(黃生周)·황업주(黃業周) 등과 함께 장흥의 3월 15일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각 면(面) 별로 연락 준비의 책임도 결정하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추가로 등사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1919년 3월 15일 장날 오후에 읍내 장터에서 김재반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만세의 신호를 알리고, 수백 명 군중의 만세시위운동을 진두에서 지휘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3월 16일 일제 경찰에 20여 명의 천도교인과 함께 붙잡혀,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이른바 ‘천도교 구파(舊派)’에 속하여 선교와 사회운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대에 천도교중앙종리원(天道敎中央宗理院) 종리사(宗理師), 1928년부터 천도교중앙종리원 경리과 대표위원, 1931년 천도교중앙종리원 감사관정(監査觀正), 1932년부터 천도교중앙총본부 금융관장(金融觀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 사이 1925년 8월 이래 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천도교통일기성회(天道敎統一期成會)를 발기하고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31년 10월 천도교 구파와 신파의 합동이 제창되었을 때 오상준(吳尙俊)·이종린과 함께 구파의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입도조문(入道條文), 제도 문제, 법회(法會) 용어의 개정, 고문실(顧問室) 신설 등을 약정하고, 같은 해 12월 23일 합동총회를 열어 정식으로 합동을 선언하였다. 이날 집행부 선임을 위한 전형위원, 교회 집행기관으로 검사(檢査) 업무를 주관하는 감찰원정(監察元正)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3년 9월 최준모(崔俊模)·한순회(韓順會) 등과 함께 천도교에 의한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멸왜기도문(滅倭祈禱文)」을 작성하여 전국의 천도교도들을 대상으로 읽게 함으로써 항일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내용은 「안심가(安心歌)」의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써,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으로부터 조화를 받아 하룻밤 사이에 소멸시키고, 그 사적(史蹟)을 후세로 무궁하게 전할 것을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이(汗夷)의 원수 갚아보세”라는 것이다. 1936년 2월 황해도 각 군의 천도교회를 중심으로 부인강좌(婦人講座)를 개최하고 강사로 활동하는 등 천도교 간부로서 다수의 강연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아울러 1920~30년대에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 에 다수의 글을 남겼다.

 

1936년부터는 대도주(大道主) 박인호(朴寅浩)가 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地日紀念日)(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의 승통기념일)을 계기로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뜻에 따라 교인들로 하여금 아침저녁 식고(食告)할 때마다 일본의 멸망을 기원하는 특별 기도를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림에 따라, 다른 중앙 간부들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전국 교도들을 대상으로 위의 기도문 내용을 암송하며 ‘멸왜기도’를 드릴 것을 지시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보고, 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같은 해 12월 20일 최준모, 한순회 등과 특별기도 문제를 협의하여, 종전대로 하면 일제 당국의 탄압을 받을 것이므로 표면적으로 “동양 평화의 기초가 하루바삐 확립되기를 기원한다”는 문구를 부가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교도들에게는 이는 관헌을 기만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지도하였다. 이들은 전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멸왜기도’를 실시하고 「안심가」를 부르게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이 1938년 2월 17일 황해도 신천경찰서에 발각되면서 전국적으로 천도교 교역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사변하의 지하활동」, 「극비의 불온계획」, 「조선독립을 몽상」, 「천도교의 대 음모」, 「특별희사금도 모집」, 「불온문 특별기도문 일반신도에게 배부」 등의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천도교계의 이 같은 활동은 당시 ‘멸왜기도사건’, ‘무인(戊寅)멸왜기도운동’ 등으로 불렸으며, 오늘날 ‘무인독립운동’으로 일컬어진다.

 

1938년 3월 4일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으며, 주도자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30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황해도경찰부에서 해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국(送局)되었다. 일제 당국은 전시하에서 사건이 확대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같은 해 5월 11일 밤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 하지만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고생하다가, 1940년 6월 27일 서울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참고문헌|

「昭和十三年度に於ける鮮內思想運動の槪況」, 『사상휘보』 18, 1939. 3 ; 「天道敎 中央宗理院 公緘 郵送의 件」, 1928. 11. 19, 『思想問題에 關한 調査書類』 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天道敎中央宗理院 監査觀正 公函郵送의 건」, 1931. 12. 23, 『思想에 關한 情報』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集會取締 狀況報告(通報)」, 1932. 12. 24, 『思想에 關한 情報』 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天道敎 中央敎會 幹部 檢擧에 대한 同敎 領袖 李鍾麟의 言動에 관한 건」, 1938. 3. 9, 『思想에 關한 情報』 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宗敎類似團體槪況」, 1938. 9, 『治安情況(昭和 十三年 九月, 京畿道)』,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天道敎任實敎史』,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조선일보』, 1925. 9. 5, 1930. 11. 13, 12. 25, 1937. 7. 31, 1938. 5. 1·16, 1940. 6. 30 ; 『동아일보』, 1925. 8. 23, 1930. 11. 19, 12. 25, 1938. 5. 1 ; 『매일신보』, 1922. 4. 15, 1925. 12. 24, 1930. 12. 25, 1938. 5. 1 ; 『시대일보』, 1925. 11. 6 ; 『중앙일보』, 1932. 12. 26 ; 『조선중앙일보』, 1936. 2. 14 ; 『경성일보』, 1938. 8. 25 ; 車相瓚, 「全羅南道踏査記」, 『개벽』 63, 1925. 11 ; 心耕學人, 「大會以後의 天道敎經倫」, 『삼천리』 12, 1932. 2 ; 南哲, 「問題 중에 잇는 天道敎의 解剖와 展望, 그 出現과 生長」, 『동광』 33, 1932. 5 ; 『天道敎長興敎區史』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8권, 197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 3, 1988 ; 이용락, 『3·1운동실록』, 금정, 1994 ; 김기삼, 『김재계의 독립운동 연구』, 조선대학교출판국,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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