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우권 金宇權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우권
한자명 金宇權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도
생몰년월일 미상 ~ 1920. 6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서로군정서
관련 사건  
주요 활동 서로군정서 의용대 제1중대 장교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1)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에서 거주하다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1922년 서로군정서 의용대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간도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서로군정서 의용대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였는데, 이주 시점과 서로군정서 가입 시점은 알 수 없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1월 새 각원들이 취임하게 되면서 군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할 아래에 있는 서간도 지구 군사기구인 서로군정서로 개편되었다.

 

의용군은 서로군정서의 군부대로 총 5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 중 제1중대는 신흥학교 졸업생 채찬(蔡燦)·신용관(辛容寬) 등에 의하여 조직되었으며, 주둔지는 지안현(輯安縣)과 퉁화현(通化縣) 일대였다. 1922년 6월 2일, 의용대 총지휘관이었던 김추당(金秋堂)이 남만통일회를 조직하고 결의안을 발표하면서 서로군정서 의용군 직제와 결의안이 정해졌는데, 이때 제1중대 장교가 되었다.

 

1922년 10월 하순경, 의용대 제1중대 장교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2명의 대원들을 통솔하여 류허현(柳河縣)으로 이동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야저구(野猪溝)에 있는 김교성(金敎成)의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밀정의 고발로 중국 산림대(山林隊)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부대를 이끌고 산 쪽으로 이동하며 산림대와 총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은폐물이 없는 불리한 지형으로 몰리게 되었고 부사(副士) 김하성(金河成), 참사(參士) 왕유박(王瑜璞), 대원 김관학(金寬學)·한정도(韓正道)·전명근(田明根)과 함께 전사하였다.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하였을 때 부하들이 그를 데리고 피신하려고 하자, 자신을 구하게 되면 부대원 전원이 죽게 될 것이라고 하고 총을 꺼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사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1920년 6월, 1925년 7월, 1922년 10월 하순으로 다르다.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면서 독립군의 상황을 주기적으로 보도한 『독립신문』의 기사가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를 경우 사망시점은 1922년 10월 하순경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순국한 김우권의 약력 보도(『독립신문』 1922. 11. 30) [판형1]

 

⋮남기현⋮

|참고문헌|

在上海 日本總領事館 警察部 第二課, 『朝鮮民族運動年鑑』, 1932(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2, 2009) ; 『독립신문』, 1922. 11. 30 ; 김승학, 『한국독립사』, 196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5권, 1973.
  • 순국한 김우권의 약력 보도(『독립신문』 1922. 11. 30)
  • 사망한 김우권의 약력 보도(『독립신문』 1922.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