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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정연 金正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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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정연
한자명 金正演
본 관 경주(慶州)
이 명 자 : 장언(長彦)
출신지 경상북도 예천(醴泉)
생몰년월일 1891. 7. 25 ~ 1962. 5. 18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안동군 길안면 만세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안동군 길안면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891년 7월 25일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 용문면(龍文面) 상금곡리(上金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장언(長彦)이다. 1919년 안동 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안동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3일 안동면(安東面)에서 일어난 이상동(李相東)의 1인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3월 27일 풍남면(豊南面) 하회동(河回洞) 만세시위에 이르기까지 안동에서는 모두 14회에 걸쳐 10,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3월 17일부터 23일까지가 절정기였다.

 

당시 임하면(臨河面) 오대동(梧垈洞)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김정익(金正翼)·손영학(孫永學)·장두희(張斗凞) 등과 함께 시위를 준비하였다. 거사일은 길안면에 있는 천지시장(泉旨市場) 장날인 3월 21일로 정하였다. 오대동은 행정 구역으로는 임하면에 속하지만, 거리로는 길안면이 더 가까워서 길안면 천지시장을 거사 장소로 택한 것이었다.

 

1919년 3월 21일 김정익, 손영학과 아침 일찍 천지시장에 가서 당목(唐木) 천을 사서 ‘대한 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을 만들었다. 그 날 오후 5시쯤 천지시장 한 가운데서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장에 모인 장꾼들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오후 6시쯤 시위대와 행진하여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김정익·손영학과 함께 면사무소로 들어가려 하자, 순사가 가로막았다. 격분한 시위대는 면사무소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과 출입문을 부수고 다시 시장으로 돌아가 시위를 계속하였다. 시위대는 다시 길안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항의하였다. 그러자 순사들이 총을 쏘아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3월 22일 오후에 다시 수백 명의 시위대가 길안주재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이후 며칠 동안 검거 선풍이 있었으나, 김정익·손영학과 함께 피신에 성공하여 의성군 의성면에 있는 박재하(朴在夏)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갈 여비를 마련하던 중 1920년 2월 11일 붙잡혔다.

 

1920년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보안법 위반, 강도 예비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6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참고문헌|

「판결문(손영학 외 2인)」, 대구지방법원, 1920. 5. 21 ; 「판결문(손영학 외 2인)」, 대구복심법원, 1920. 6. 12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국역 고등경찰요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3, 201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경상북도사』 (중), 1983 ;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 1991 ; 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안동시, 1999 ;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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