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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재명 金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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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재명
한자명 金在明
본 관 선산(善山)
이 명 자 : 회현(晦賢), 호 : 일산(一山)
출신지 경상남도 거창(居昌)
생몰년월일 1852. 2. 19 ~ 1923. 6. 2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파리장서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파리장서에 서명
포상훈격(연도) 건국포장(1995)

1852년 2월 19일 경상남도 거창군(居昌郡) 남상면(南上面) 대산리(大山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회현(晦賢), 호는 일산(一山)이다. 장복추(張福樞) 학맥에 속하는 유학자이다.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유림계를 대표해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에 유림 대표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림은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했다가 서울의 분위기를 지방에 전달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일부는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3월 1일 독립선언서 낭독을 직접 목격한 김창숙(金昌淑)은 영남 유림의 종장이었던 곽종석(郭鍾錫)에게 서울의 분위기를 전달하였다. 김창숙은 유림이 중심이 되어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후,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것을 제안하였다. 3월 3일, 김창숙이 중심이 되어 주요 유림 인사 간의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는 전국 유림으로부터 서명을 수합할 것이 결의되었다. 이에 따라 이중업(李中業)·김정호(金丁鎬)·성태영(成泰英)·류준근(柳濬根)·윤중수(尹中洙)·유진태(兪鎭泰) 등이 각 지역을 담당하여 유림으로부터 서명을 받도록 하였다. 다만 실제 서명자는 거의 대부분이 경상·전라·충청 지역의 유림으로 구성되었다.

 

당초 청원서는 영남 유림의 ‘곽종석본’과 기호 유림의 ‘김복한본’ 두 종류가 마련되어 있었다. 양쪽 유림은 ‘곽종석본’이 보다 선명하고 충실하다는 점을 들어 이를 단일안으로 채택하고, 여기에 ‘김복한본’의 서명자를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총 137명의 유림단이 구성되었는데, 이들을 ‘기미유림단(己未儒林團)’이라고 한다. 이 때 경남 유림 대표로 서명에 참여하였는데 『면우집(俛宇集)』 의 「면우연보(俛宇年譜)」에 따르면 서명 순위는 34위이다.

 

이 운동은 서명자 중 한 사람인 송회근(宋晦根)이 경북 성주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면서 비로소 알려졌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인 색출로 인해 상당수의 서명자가 붙잡혀 재판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때 재판에 기소되지는 않았으나, 4월 이후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풀려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참고문헌|

경상북도경찰부 편, 『고등경찰요사』, 1934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국역 고등경찰요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3, 2010) ; 이윤상,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임경석, 「파리장서 서명자 연구」, 『대동문화연구』 제39집, 2001 ; 서동일, 「1919년 파리장서운동의 전개와 역사적 성격」,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 서동일, 「조선총독부의 파리장서운동 참가자에 대한 사법처리와 관련 수감자의 대응」,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8,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