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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익동 金翊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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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익동
한자명 金翊東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성주(星州)
생몰년월일 1892. 6. 21 ~ 1949. 9. 11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거창군 가조면‧가북면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3월 20일 거창군 가조면‧가북면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92년 6월 21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지사면(志士面) 수륜동(修倫洞, 수륜면 수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의 열기가 전국으로 번져가는 가운데 3월 중순 거창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가북면(加北面)의 김병직(金秉直)과 가조면(加祚面)의 어명준(魚命俊)은 3월 20일 가조면 장기리(場基里)의 장날을 기하여 5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호(金濩)·신병희(愼炳禧)·어명우(魚命佑)·어명철(魚命喆)·오문현(吳文鉉)·이병홍(李秉洪) 등 6인은 만세시위를 위한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3월 22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하지만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거사 당일인 3월 22일 아침 일본군 헌병대에 주도 인물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거사를 위해 모여 있던 주민들은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날 가조면과 가북면의 3,0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시위대열에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도 인물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날 오후 2시 30분경 몽둥이를 가지고 장기리 만도정(晩嶋亭) 앞에서 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운 후 시위대와 함께 거창면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사포현(沙浦峴)에 이르자 일본 헌병이 공포를 발사하며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와 함께 함성을 지르며 헌병들을 향하여 돌진하였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 사건으로 붙잡힌 이후 1919년 6월 5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