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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익근 金益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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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익근
한자명 金益根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安東)
생몰년월일 1871. 12. 9 ~ 1921. 4. 2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안동군 안동면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만세시위 참여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06)

1871년 12월 9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안동면(安東面) 신세리(新世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어물 행상을 하다가 안동 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안동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1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3월 17일부터 23일까지 만세운동은 절정을 이루었고, 안동군 19개 면 중 11개 면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만세운동은 주로 장날에 장터를 이용하여 일어났으며, 안동 지역 총 14회의 시위 중 8회가 장날에 전개되었다.

 

안동면의 만세시위는 안동교회(安東敎會)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계와 송천동(松川洞)에 사는 송기식(宋基植) 등의 유림계가 준비하였다. 안동교회에서는 3월 13일 안동면 장날에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하루 전날인 3월 12일에 계획이 발각되어 일부 주도자가 붙잡혔다. 다행히 일제 경찰의 체포를 피한 안동교회 장로 김병우(金炳宇)는 교인들과 함께 다음 장날인 3월 18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하였다. 또한 김병우는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며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협동학교(協東學校), 보문의숙(寶文義塾),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도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8일 안동 장날을 맞아 낮 12시 기독교인 30여 명이 곡물전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남문통(南門通)과 북문통(北門通)을 오가며 행진을 벌였고, 이때 시위대에 참여하였다. 동시에 유림들이 이끄는 시위대도 동문통(東門通)부터 행진해 와 합류하였다. 경찰과 군인의 제지로 시위대가 해산되면서 14명이 붙잡혔다.

 

오후 6시 무렵 기독교인 60여 명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밤이 되자 시위 군중은 더욱 많아졌고, 자정을 넘어설 무렵 2,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등의 관공서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돌을 던졌다. 경찰과 수비대가 총을 쏘아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날 이종악(李鍾岳), 이비호(李丕鎬) 등과 함께 새벽 1시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안동경찰서, 안동군청 등에 몰려가 만세시위를 벌이다 붙잡혔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오히려 그 해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량을 높여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5. 10) [판형1]

 

⋮김정인⋮

|참고문헌|

「판결문(김영석 외 8인)」, 대구복심법원, 1919. 5. 10 ;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국역 고등경찰요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3, 201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경상북도사』 (중), 1983 ; 안동교회, 『안동교회80년사』, 1989 ;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 1991 ; 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안동시, 1999 ;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 ; 경상북도, 『경북독립운동사 Ⅲ- 3·1운동』, 2013.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5. 10)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