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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은수 金銀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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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은수
한자명 金銀守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安東)
생몰년월일 1885 ~ 미상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안동군 임동면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3월 21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만세시위 참여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11)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현 안동시) 임동면(臨東面) 중평동(中坪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8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 노동일을 하고 있었다. 그 해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안동군에서는 임동면, 임하면(臨河面), 길안면(吉安面), 일직면(一直面)에서 만세시위가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임동면 시위는 3월 3일에 열린 고종 장례식에 참석했던 류동시(柳東蓍)가 돌아오면서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류동시는 영남의 거유(巨儒)라 불리는 류치명(柳致明)의 증손이었다. 그는 임동면 수곡동(水谷洞)에 있는 협동학교(協東學校)의 류동태(柳東泰), 이균호(李均鎬), 류연성(柳淵成) 등과 만세시위를 협의하고 협동학교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3월 15일 편항시장(鞭巷市場) 공동 타작장에서 류곡란(柳谷蘭)·류교희(柳敎熙)·류연성·류동수(柳東洙)·박재식(朴載植)·박진성(朴晋成)·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이 모여 3월 21일 편항시장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약속하였다. 류연성은 대곡동(大谷洞)과 위동(渭洞), 류동수는 마령동(馬嶺洞), 이강욱과 홍명성은 갈전동(葛田洞), 류곡란·박재식·박진성은 편항시장 부근, 류교희는 박곡동(朴谷洞)과 수곡동(水谷洞)에서의 주민 동원을 맡았다.

 

3월 21일 오후 1시쯤 지나 편항시장에서 먼저 기독교인 1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2시쯤 류연성을 비롯한 10여 명의 주도자들이 시장 가운데 등장하였다. 류연성의 연설이 끝난 후 주도자들이 먼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이 열렬히 호응하였다.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시위대에 가담하여 만세를 불렀다. 일본인 순사 우치다(內田)가 만세시위를 제지하다가 주재소로 몸을 피하자 5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로 들어가 무기를 빼앗아 우물에 버리고 서류를 파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어 시위대는 우치다 순사와 권택석(權泰奭) 순사보를 구타하고 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오후 5시경에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로 몰려가 건물과 집기를 파괴하였다. 시위대는 다음날 새벽 2시에 되어서야 해산하였다. 안동경찰서로부터 급파된 순사부장 1명, 수비대 군인 8명이 도착하여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면서 붙잡혔다.

 

1919년 6월 2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과 소요로 징역 2년을 받고 항소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 해 8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8. 19) [판형1]

 

⋮김정인⋮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 6. 26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8.19 ;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편, 『경상북도사』 (중), 1983 ;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편,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 1991 ; 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안동시, 1999 ;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 ; 김희곤 외, 『경북독립운동사Ⅲ -3·1운동-』, 경상북도, 2013.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 8. 19)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