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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호 金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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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호
한자명 金虎
본 관  
이 명 호 : 소림(嘯林), 이명 : 호익(虎翼)
출신지 함남 함흥
생몰년월일 1881 ~ 미상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홍범도 의병부대, 흥업단, 대한독립단, 대한국민단, 광정단, 정의부
관련 사건 청산리대첩, 전만통일회의
주요 활동 1907년 홍범도의진에 부관으로 가담, 1909년 흥업단 단장, 1921년 대한독립단 고문 및 대한국민단 회장으로 활동, 1922년 4월 독립군단을 광정단으로 개편, 1924년 전만통일회의주비회에 참가, 1924년 11월 정의부 참가하여 활동
포상훈격(연도) 독립장(2010)

1881년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에서 태어났다. 호는 소림(嘯林)이고, 이명은 호익(虎翼)이다. 1907년 차도선(車道善)·홍범도(洪範圖) 등이 함경도 갑산(甲山)에서 의병부대를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부관에 임명되었다. 이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함경도를 무대로 일제를 상대로 경술국치 이전까지 국권수호활동을 벌였다.

 

1910년 나라가 일제에게 넘어가자 서간도로 건너갔다. 1915년 봄부터는 이종호(李鍾浩)·이동휘(李東輝)·김도여(金道汝)·김하구(金河球)·김하석(金河錫)·이진룡(李鎭龍)·홍범도 등과 연락을 취하며 서북간도와 노령을 연결시킨 무장활동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국내의 많은 청장년들이 만주로 넘어오자 이들을 기반으로 지린성(吉林省) 푸쑹현(撫松縣)에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였다. 흥업단 단장을 맡아 부단장 김혁(金赫), 총무 윤세복(尹世復), 재무 이원일(李源一), 경호 오제동(吳濟東) 등과 조직을 이끌었다. 흥업단에 가입한 청년들은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족학교이자 독립군 양성소인 백산학교(白山學校)에 보내져 교육을 받고 독립군으로 양성되었다. 성립된 지 1년이 넘으면서 흥업단 병력은 약 2백 명 정도 되었다. 이들 흥업단 독립군들은 주둔지 주변의 땅을 개간해 스스로 의식을 해결하면서 유격대를 결성해 국내로 진입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기관을 파괴하는 등의 무장활동을 펼쳤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후 흥업단 소속 독립군도 다른 독립군과 함께 미산(密山)을 거쳐 소련의 이만까지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기존의 각 군단을 연합해 1921년 3월 대한총군부(大韓總軍府)를 결성하였다. 그 해 4월 12일에는 대소 36개 독립군단 대표들이 합의해 독립군대회를 개최하여 총군부를 대한독립단이라 개명하고 이 단체를 이끌어 갈 간부들을 선임하였다. 총재 서일(徐一), 부총재 홍범도, 외교부장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 김좌진(金佐鎭),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참모부원 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 지청천(池靑天) 등이었다. 이때 백순(白純)과 함께 고문에 선임되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자 구성원들 간에 이견이 생겨났다.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며 자유시(自由市)까지 이동하자는 의견과 만주로 되돌아가자는 견해로 나뉜 것이다. 이때 지린성 창바이현(長白縣)으로 돌아 와 새로 생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 총책임자인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밑에는 부회장 이은향(李殷鄕), 총무 윤병용(尹秉用), 비서 김용대(金容大), 군사부장 김찬(金燦), 경호부장 한창언(韓昌彦)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국민단은 청산리전투 후 함께 이동하지 않고 남아 있던 흥업단 지단원들이 1921년 10월 대한독립군비단과 통합하여 만든 단체였다.

 

1922년 4월에는 태극단을 병합시킨 광복단까지 합병해 단장에 취임하고 독립군단의 이름을 광정단(光正團)으로 변경하였다. 광정단은 1922년 4월 15일 ‘정의를 표방하고 인도를 발휘하며 민족성 계발(啓發)과 적개심(敵愾心) 양성’, ‘철혈정신으로 국가 독립의 완전한 성취를 위해 분투 노력’을 주 내용으로 하는 단칙을 발표하였다. 항일무장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단체임을 밝힌 것이다. 창바이현 17도구(道溝) 동평덕리(東坪德里)에 본부를 두고 단장을 비롯한 부단장, 총무, 비서 등으로 구성된 총부를 구성하였다. 광정단 소속 독립군은 1922~1923년 활발한 국내진입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1923년 1월부터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편을 비롯한 독립운동계가 직면한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약 5개월간 개최된 이 회의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현 임시정부를 어느 정도 수정해 계속 이어가자는 개조파와 새로운 지도기관을 수립하자는 창조파 간의 의견차만 돌출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회의에서 창조파는 새 정부조직인 국민위원회 구성원을 발표하였는데, 국민위원 명단에 이름이 들어 있다. 직접 국민위원 임명을 찬성했는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는지 등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어 창조파가 독립운동계의 지도급 인사로 생각해 명단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

 

1923년 초, 백순(白純)·윤각(尹覺)·박관해(朴觀海)·김태섭(金太燮)·남진호(南鎭浩)·이장녕·지장호(池章浩)·나중소 등과 만나 재중 한인사회를 이끌어 갈 자치기관 설립을 협의하였다. 남북만주 여러 지역과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이들 지도급 인사들은 펑톈[(奉天), 현 선양(瀋陽)] 서문(西門) 밖 무림빈관(茂林賓舘)에 모여 자치기관 설립을 위한 주비회(籌備會)를 결성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24년 3월 하순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을 통합시키기 위한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가 조직되었다. 주비회는 이장녕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약 4개월간 준비 기간을 거쳐 그 해 7월 10일 지린(吉林)에서 주비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서로군정서·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대한독립군·대한독립군단·통의부(統義府)·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의성단(義成團) 대표들이 모인 이 발기회에 윤병용과 함께 광정단 대표로 참가하였다. 참가 대표들은 민족자결의 근본원칙 하에 만주 독립운동계만이라도 통일하자는 발기문을 채택하였다.

 

이후 약 3개월간 소속 단체와 타 단체 대표들을 만나 설득해 1924년 10월 18일 본회의를 개최하였다. 본회의에는 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와 고본계(固本稧)·학우회(學友會) 등 3단체가 더 참가하였다. 본 회의는 통의부 대표로 참가한 김동삼(金東三)이 의장이 되어 이끌어 갔다. 회의 중 대한독립군·대한독립군단·학우회 등은 이념의 문제로 탈퇴하고 나머지 8개 단체가 하얼빈·액목(額穆)·북간도(北間島)의 선을 그어 그 이남 만주를 관할할 통합단체를 만든다는데 합의하고 분과위원을 선임하였다. 자치·군사·생계·교육 등의 분과가 만들어 졌고, 윤병용·승진(承震)과 함께 재정분과를 담당하였다.

 

본 회의 후 소속 단체로 돌아 간 대표들은 내부의 모든 문제를 정리한 뒤 1924년 11월 24일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이 같이 성립된 정의부는 발기회 본회의에서 논의된 바대로 하얼빈에서 액목을 거쳐 북간도까지 선을 그어 그 이남의 남만주를 관할지역으로 하였다. 즉 입법·사법·행정의 체계를 갖추어 관할지역내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산업을 육성시켜 생존을 영위케 하는 한편 의용군을 편성해 항일무장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 이 단체의 노선이었다. 따라서 정의부는 독립군정부(獨立軍政府)의 성격을 띤 단체였다.

 

성립초기 정의부 중앙조직은 중앙행정위원장 이탁(李沰), 간정원(幹政院) 비서장 김원식(金元植), 중앙심판원장 김응섭(金應燮), 민사위원장 현정경(玄正卿), 군사위원장 지청천, 법무위원장 이진산(李震山), 학무위원장 김용대(金容大), 재무위원장 김이대(金履大), 교통위원장 윤병용, 생계위원장 오동진(吳東振), 외무위원장 김동삼, 의용군사령관 지청천 등이었고, 입법기구인 중앙의회가 따로 구성되었다. 간정원과 사법기관인 중앙심판원을 뺀 중앙행정위원장과 위원장들은 행정업무를 협의하는 기구인 중앙행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관할지역 내 각 한인사회에는 가구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체계적으로 총관구(總管區)·지방(地方)·백가장(百家長)·구(區)·십가장(十家長) 등의 조직을 설치해 관할지역내 한인들을 관리하고 지원하였다.

 

정의부를 성립시키기 위한 모든 회의에 참여했지만 초기 중앙조직에서는 빠졌다.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지만 교통위원장에 선임된 윤병용과 학무위원장 김용대 등이 광정단의 인물들이라 통합된 다른 단체 지도급들과 안배하는 차원에서 빠진 듯싶다. 그러나 성립되고 약 1년이 넘은 1926년 1월 11일 발표된 포고 제13호에는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포고문은 중앙행정위원회가 중앙의회를 해산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1925년 후반 오영선(吳永善)과 이유필(李裕弼)이 정의부로 와 만주 독립운동계가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해 줄 것을 권유하였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들은 이들과 협의 후 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部) 등과 협의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을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으로 추천해 상하이로 가게 하였다. 행정위원들은 이를 중앙의회에 알리고 의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의회는 정의부의 이념과 노선에 위배된다고 반발해 중앙행정위원회 불신임을 의결하였고, 행정위원회 또한 중앙의회 해산을 결정해 포고문을 발표한 것이었다.

 

1927년 4월 1일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결성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농민호조사는 재만 한인의 산업 부흥과 위생·보건·교육 등 총체적인 생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기구였다. 35명의 발기인 대부분은 정의부 소속의 인사들이었지만 농민호조사 결성을 주도한 인물은 안창호(安昌浩)였다. 1927년 초 지린을 방문한 안창호는 재만 한인의 생계 안정을 위해 대단위 농장 설립 계획을 정의부측 인사들과 협의하였다. 그 결과 한인들에게 거둔 출자금으로 대규모 토지를 구입해 농사를 지어 소득을 분배하고, 이익금으로 더 많은 토지를 계속 구입해 간다는 방식에 합의하였다. 그 사업을 준비하고 경영하기 위한 기구가 농민호조사였다. 그러나 이 농민호조사의 사업은 1927년 4월 같은 시기에 진행된 만주지역 민족유일당운동과 겹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진행되던 기간 중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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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機密 제12호, 排日鮮人ノ組織セル北濱義勇團」, 1915. 6. 2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關參諜 제524호, 普通報 제19호」, 1920. 8. 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 2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大正11년(1922) 1월 16일, 「關機高收 제12699호, 長白縣下不逞團ノ系統的調査」, 1922. 1. 1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 제6호, 在支鮮人自治團體組織運動ニ關スル件」. 1923·1. 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關機高收 제6145호, 光正團現況」, 1924. 3. 2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 제277호, 國民委員會議事錄ニ關スル件」, 1924. 11. 1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 제22호, 正義府中央議會解散ニ關スル件」, 1926. 1. 30,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3, 東京: 原書房,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7, 1973 ; 국사편찬위원회 편,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6·7·8, 1969 ; 애국동지원호회 편, 『韓國獨立運動史』, 195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4, 1968 ; 채영국, 『한민족의 만주독립운동과 正義府』, 국학자료원, 2000.
  • 일제 측의 김호에 관련 보고(1918.4.11).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