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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창균 金昌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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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창균
한자명 金昌均
본 관  
이 명 김동윤(金東允)
출신지 평안북도 위원(渭原)
생몰년월일 1892 ~ 미상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대한독립단, 대한통의부, 참의부
관련 사건 사이토저격사건, 강계주재소습격사건, 화창주재소습격사건
주요 활동 1922년 대한독립단 의용군, 1924년 참의부 2중대 제2분대장, 참의부 1중대 소대장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95)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 서태면(西泰面) 신천리(新川里) 출신이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1892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김동윤(金東允)을 사용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주소는 만주 지안현(輯安縣) 유수림자(楡樹林子)이다.

 

1922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백광운(白狂雲)의 부하로 의용군에 가입하였다. 이 해 봄 의용군 1중대 제2소대 제3분대장인 김종호(金宗浩)와 신영숙(申永淑)·현성희(玄成熙) 등과 국내로 들어와 강계군(江界郡) 청풍동(淸風洞) 주재소를 습격하여 교전을 벌였다. 위원군 송면(松面) 석포동(石浦洞)에서는 밀정 송의봉(宋義鳳)을 사살하고, 강계별하(江界別河)에 있는 장명준(張明俊)의 가옥을 소각시키는 등 친일파를 처단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1923년 (음)1월 이희준(李義俊)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에 가담했다. 소대장인 참위(參尉) 전세웅(田世雄)의 부하가 되어 만주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들어와 강계군 어뢰면(漁雷面) 풍룡동(豊龍洞) 골짜기에서 평북경찰부 수색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1924년 5월 19일 당시 참의부(參議府) 제2중대 1소대 소속으로 소대장인 참위 한웅권(韓雄權), 오장(伍長) 이춘화(李春和), 같은 일등병인 현성희(玄成熙)·이명근(李明根)·김려하(金呂河)·전창근(田昌根) 등 50여명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해 제3소대장인 장창헌(張昌憲)의 지휘 하에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이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 중류를 따라 국경을 순찰하면서 강계군 마시탄(馬嘶灘)을 통과할 때 저격하고자 하였다. 19일 오전 지안현(集安縣) 사랑곡(四狼谷) 팔합목(八合目)에 잠복하고 있던 중 강안에서 프로펠러가 지나는 것을 보고 돌격하였다. 총독은 뒤에 오는 배에 타고 있어 성공하지 못했고 경호선에 탄 경비원들과 몇 시간 동안 교전을 벌였다.

 

7월 12일에는 2중대 소속인 김창옥(金昌玉)·이기섭(李基涉)·한영환(韓永煥)·김영하(金永河)·신용섭(申龍涉) 등과 평북 위원군(渭源郡)의 화창면(和昌面) 주재소를 습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동지 신용섭이 사망하였다. 8월 1일에는 이두성(李斗星)의 지휘 하에 대원 6명과 함께 화창주재소의 뒷산에 올라가 폭탄 3개를 던지며 공격했으며, 이후 황희운(黃稀雲)에게 30원, 황윤하(黃允河)·박기룡(朴枝龍)에게 20원씩, 배응도(裵應道)에게 50원, 이지수(李枝洙)에게 10원, 진군팔(泰君八)에게 20원의 군자금을 징수해 이의준(李義俊)과 만주로 건너갔다.

 

1926년 9월 13일 참의부 1중대 소대장으로 변장하고 유수림자 강 어귀에서 평북 위원군 서진면 신천동(新川洞)으로 건너오다 위원경찰서에 붙잡혔다. 1927년 12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1928년 3월 14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살인강도·방화·주거침입·통신방해·전신법위반 등으로 이의준과 함께 사형을 받았다.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했으나 그 해 9월 15일 1심대로 사형이 구형되자 재판장에게 “나는 죽기를 싫어함도 아니오, 죽음을 회피하려는 구구한 변명도 아니니 사형을 당하거나 와석종신(臥席終身)을 하거나 죽기는 일반이오. 결국은 시간문제에 불과하오. 그러나 3·1운동 이후로 많은 동지가 죽었으되, 오늘날 나에게 사형을 구형함은 나의 행동에 비추어 너무 지나친 구형이 아닌가 생각하나 다만 내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만으로 사형을 준다면 사양할 바도 아니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1928년 11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았으나 “이미 각오한 것이니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고 퇴정하였다. 이후 히로히토(裕仁)의 일왕 즉위에 맞춰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창균 공판 보도(『매일신보』 1927. 11. 27) [판형1]

 

⋮박걸순⋮

|참고문헌|

「機密 제235호, 南滿統義府軍隊의 宣言文 및 警告文 送付의 건」, 1924. 5. 2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동아일보』, 1926. 9. 17·27, 11. 1, 1927. 10. 17·19, 11. 11·30, 12. 21·23, 1928. 2. 8·19, 3. 4·17, 7. 17, 9. 15·22·27, 10. 4·19·23, 11. 1·8·9·13, 1929. 5. 24 ; 『신한민보』 의연금 관련 기사 ; 『중외일보』, 1928. 2. 8, 3. 17, 4. 9, 7. 17, 10. 5·18, 11. 1·9·13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東京 : 原書房,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6권·제7권, 1975·1976 ; 국회도서관 편, 『한국민족운동사료』 2, 19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0·11, 1976 ; 송상도, 『(국역)기려수필』 3, 문진, 2014.
  • 김창균 공판 보도(『매일신보』 1927.11.27)
  • 김창균 공판 보도(『매일신보』 1927. 1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