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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창근 金昌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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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창근
한자명 金昌根
본 관 의성(義城)
이 명 호 : 일초(一艸)
출신지 경상북도 봉화(奉化)
생몰년월일 1878. 2. 16 ~ 1959. 5. 5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1919년 제1차 유림단, 1923년 민립대학기성회 봉화지방부, 1923년 봉화청년회, 1926년 제2차 유림단
관련 사건 제1차·제2차 유림단 의거, 나석주 의거
주요 활동 1919년 3월 제1차 유림단 의거, 1926년 12월 제2차 유림단 의거, 1926년 12월 나석주 의거
포상훈격(연도) 대통령표창(1992)

1878년 2월 16일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봉화면(奉化面) 해저리(海底里)에서 아버지 김항림(金顼林)과 어머니 진성 이씨(眞城李氏) 이중(李中)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호는 일초(一艸)이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의 족형으로 1902년 혜민원(惠民院)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

 

1919년 3월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도한 제1차 유림단 의거, 일명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 있던 김창숙이 친척들이 살고 있는 봉화에 와서 경상도 각 지방의 유림들을 규합할 방안을 논의하자 이때 참여하였다.

 

1923년 7월 7일 설립된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 봉화지방부(奉化地方部)의 집행위원장(執行委員長)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朝鮮民立大學期成準備會)가 결성되었다. 1923년 3월 발기총회 이후 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와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에 지방부가 조직되었는데, 민립대학기성회 봉화지방부는 1923년 6월경 봉화청년회(奉化靑年會)가 지방부를 설치하기 위한 군민대회를 개최하면서 조직됐다. 봉화청년회는 1923년 5월 19일 열린 정기총회에서 민립대학기성회 지방부 설치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임원들은 7월 7일 봉화지방부 설치를 위한 집행위원을 맡기로 하였다. 이때 봉화청년회 임원으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26년 김창숙이 주도했던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제1차 유림단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이 1925년 봄 베이징(北京)에서 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내몽고 지역의 토지 3만 정보(약 297,522㎢)를 개간하여 군사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1925년 1월 군사 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20만 원을 국내의 영남 지역 유림으로부터 모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창숙의 군자금 모집을 후원하다가 1926년 12월 붙잡혀 3개월 여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기소중지 되어 불기소로 풀려났다.

 

이후 나석주(羅錫疇) 의거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나석주는 1926년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안타깝게도 나석주의 의거는 성공하지 못했는데, 여기에 관계되었다고 조사를 받았다. 이후 증거 불충분 불기소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참고문헌|

「형사사건부」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국역 고등경찰요사』,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 3, 2010) ; 『황성신문』, 1902. 8. 2 ; 『동아일보』, 1923. 7. 14 ; 『조선일보』, 1923. 7. 14 ; 김창숙, 『국역 심산유고』,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9 ; 송상도, 『(국역)기려수필』, 문진, 2014 ; 김희곤, 『봉화의 독립운동사』, 봉화군, 2007 ; 김희곤, 「제2차 유림단 의거 연구-심산 김창숙의 활동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38, 대동문화연구원, 2001 ; 최미정,「봉화 해저마을 의성 김씨 문중의 유림단 의거 참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9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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