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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종진 金鍾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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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종진
한자명 金鍾鎭
본 관 선성[宣城, 현 예안(禮安)]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영주(榮州)
생몰년월일 1904. 9. 15 ~ 1952. 1. 28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안동청년동맹, 신간회 안동지회, 안동콤그룹, 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영주), 적색농민조합(영주)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0년대 안동청년동맹 와룡지부와 신간회 안동지회 등 안동 사회운동 참여. 1931년 안동콤그룹 가입. 1932년 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적농부 위원, 적색농민조합 책임위원 등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01)

1904년 9월 15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평은면(平恩面) 수도리(水島里, 현 문수면(文殊面) 소재)에서 태어났다. 무섬이라고도 불리는 수도리는 대대로 선성(宣城, 현 예안(禮安)) 김씨의 집성촌이 있는 곳이다.

 

10세경부터 수년간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927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였다. 1920년대에 안동청년동맹(安東靑年同盟) 와룡지부(臥龍支部)와 신간회(新幹會) 안동지회에 가입하는 등 주로 안동의 사회운동에 관여하였다. 1928년 10월경 일본 유학생 출신 김화진(金華鎭)이 중심이 되어 문맹퇴치, 한글교육, 민족정신 앙양 등을 목표로 수도리에 설립한 아도서숙(亞島書塾)의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도서숙은 영주 사회운동의 주요 인물들을 대거 양성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아 1933년 7월경 폐쇄된 민족교육기관이었다.

 

1931년 7월 안상윤(安相潤)의 지도로 활동하던 안동콤그룹에 가입하였다. 안동콤그룹은 다소 침체된 안동지역 청년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부활을 목적으로 같은 해 3월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당시 영주에서는 김동필[(金東弼), 일명 김봉호(金鳳鎬)]·김화진 등을 중심으로 한 ‘영주군 공산주의자협의회’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도 관여했던 듯하다. 1932년 7월 이 공산주의자협의회가 대대적으로 검거될 당시 함께 붙잡혔는데, 같은 해 9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1932년 9월 중순경부터 마침 안상윤이 영주군 평은면 수도리 박승서(朴勝緖)의 집에 은신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영주에서 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赤色農民組合再建鬪爭準備委員會) 조직을 준비하려 하였다. 김명진(金命鎭)·박찬상(朴贊尙)·김용진[(金龍鎭), 일명 김우진(金宇鎭)] 등과 함께 안상윤을 찾아가서, 영주군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 이후 영주의 상황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상윤이 남아있는 동지를 중심으로 우선 수도지방을 중심으로 소수라도 재건 조직을 도모하자고 제안하여, 같은 해 10월 5일 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는 산하에 지도부·적농부(赤農部)·반제부(反帝部)를 두었는데, 이중 적농부 위원을 맡았다. 적농부는 정기적으로 농민강좌회를 개최하고 동지를 규합하며 적색농민조합 조직을 활동 목표로 하였다. 또한 1920년대 풍기소작조합(豊基小作組合)이나 영주농민조합 등의 농민운동 과정에서 계속 문제되어 온 소작료 인하나 지세 공과금의 지주 부담 등을 조건으로 대중적인 투쟁을 일으키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았다.

 

지도부 위원이었던 안상윤이 위원회를 결성한 다음날인 10월 6일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하고 안동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후 실질적으로는 반제부를 맡은 김명진과 함께 적농부를 맡아 동지들을 규합하고 독서회를 운영하였다. 이들은 안상윤으로부터 잡지 『삼천리(三千里)』, 마르크스의 『자본론(한글판)』 등을 빌려 읽고 토론하였으며, 11월 7일 러시아혁명일이나 5월 1일 메이데이 등을 기념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한편 적농부에서는 김계진(金季鎭) 등을 동지로 가입시키고, 같은 해 12월 7일 수도리를 중심으로 먼저 적색농민조합을 재건하고 그 책임위원을 맡았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1933년 5월 메이데이를 기하여 인근 봉화(奉化)의 적색농민조합재건위원회와 함께 공동투쟁을 벌이고자 계획한 일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조직은 또 다시 와해되었다. 1933년 5~8월 사이에 안동과 영주, 봉화에 몰아닥친 일제 검거로 모두 145명이 붙잡히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같은 해 8월 2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는데, 영주지역 활동가 4명을 포함한 2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검찰에 송치되었다.

 

1934년 7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종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판형1]
김종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판형1]

 

⋮변은진⋮

|참고문헌|

「판결문(안상윤 외 17인)」, 1934. 7. 2, 대구지방법원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2, 1992 ; 『동아일보』, 1933. 7. 14·15, 8. 12, 1934. 3. 8, 6. 16·27, 8. 12 ; 『매일신보』, 1932. 9. 30, 1933. 8. 13 ; 『조선일보』, 1934. 3. 8 ; 『조선중앙일보』, 1933. 8. 4·5, 1936. 2. 28 ; 이기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1976 ; 지수걸, 『일제하농민조합연구』, 역사비평사, 1993 ;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 『영주독립운동사』, 영주시·(사)대한광복단기념사업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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