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정상 金正祥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정상
한자명 金正祥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라남도 장흥(長興)
생몰년월일 1894. 10. 7 ~ 1965. 7. 1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수의위친계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4년 강연회에서 민족의식 고취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94년 10월 7일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출신으로 김재안(金在安)·김재희(金在禧)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1922년 말 송내호(宋乃浩)의 주도하에 결성된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에 참여하였다. 송내호는 교육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수의위친계는 소안도(所安島)에서 조직되어 소안도민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이후 완도(莞島),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지역으로 2차례에 걸쳐 확장되었다. 2차 확장 시 구례(求禮) 지역 조직원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전남 완도군 신지면(薪智面) 소재 사립 학술 강습소 교원인 임재갑과 함께 강연단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고, 1924년 8월 강습생 생도 50여 명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강연단을 구성하였다. 1924년 8월 11일부터 16일까지 신지면의 여러 동리를 돌면서 마을 주민 약 100여 명을 소집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주요 내용은 한국은 역사적으로도 타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어 자주 독립을 호상(好尙)하는 기풍이 현저한 나라로 독립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강연단원이 미리 연습한 혁명가(革命歌)를 부르게 하였는데 자유를 무시하는 폭정에 맞서 봉기해야 하며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하여 자유의 깃발과 용맹으로 전진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이러한 창가(唱歌) 교육 방식은 송내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애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주제의 창가를 통해 민족의식과 시대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25년 3월 2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1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1925년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다시 받아 목포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1926년 4월 28일 풀려났다.

 

이후 수의위친계원 송내호·장병준(張炳俊)과 함께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협동전선을 결성하여 통일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여 이를 위한 좌우합작모임을 추진, 신간회 탄생의 근간이 되는 활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상 출옥 보도 기사(『동아일보』 1926. 4. 30) [판형1]

 

⋮정혜인⋮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25. 6. 27 ; 『동아일보』 1926. 4. 30 ; 孫炯富, 「植民地時代 宋乃浩·琪浩 兄弟의 民族解放運動」, 『國史館論叢』 40, 국사편찬위원회, 1992 ; 박찬승, 「일제하 소안도의 항일민족운동」, 『島嶼文化』 11, 1993.
  • 김정상 출옥 보도 기사(『동아일보』 1926. 4. 30)
  • 김정상 출옥 보도(『동아일보』 1926.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