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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재봉 金在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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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재봉
한자명 金在鳳
본 관 풍산
이 명 자 : 주서(周瑞), 호 : 근전(槿田)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安東)
생몰년월일 1891. 5. 19 ~ 1944. 3. 22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화요회, 조선공산당
관련 사건 조선독립단, 조선공산당
주요 활동 1920년 조선노동대회 가입, 1922년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1924년 화요회 결성, 1925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포상훈격(연도) 애국장(2005)

1891년 5월 19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산읍(豊山邑) 오미동(五美洞)에서 세가 좋은 참봉댁에서 김문섭(金文燮)의 다섯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 자를 주서(周瑞)라 하고, 호는 근전(槿田)이다. 이중교(二重橋) 투탄의거 주인공인 김지섭과 같은 마을 같은 문중 출신이다. 가학으로 전통 학문을 익혔고, 1907년 무렵, 곧 18세쯤 상주 정연묵(鄭演黙)의 맏딸 정재황(鄭在凰)과 혼인하였다. 1909년 고향에서 광명학교에 이어 대구 계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갔다고 알려진다. 1911년 서울 중동학교를 다녔다. 1912년 서울 이화동에 있던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專習所) 염직과에 들어가 1914년 12월에 졸업하였다. 그리고서 귀향하여 오릉학술강습회를 만들어 신교육에 나섰다.

 

1919년 8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활동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안동출신 안상길(安相吉)이 상해로 가서 안창호를 만나 교통부 소속 ‘경북 교통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귀국하였다. 안상길이 귀국하자마자 같은 안동 출신이자 경성공업전습소 동창인 이준태(李準泰)와 함께 서울 청진동 진일여관에서 세 사람이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시작했다. 안상길이 가져온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서를 증거로 삼아 자금 모으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안상길이 고향 안동 시내에 금남여관(錦南旅館)과 대구에서 새로 문을 연 쌀가게를 거점으로 자금 마련에 나섰다.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동안 만주일보 경성지사 기자로 1년 정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 12월 말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6월을 받고, 실제로는 9개월이나 갇혀 있다가 1921년 9월에 풀려났다. 일본 경찰은 이들 활동을 ‘조선독립단사건’이라고 이름 지었다.

 

풀려나자마자 노동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1920년 2월 16일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노동대회에 관련한 것인데, 이 단체는 조선노동공제회와 함께 1919년 만세운동 직후 국내 노농운동의 대표적인 단체였다. 1921년 초겨울 러시아에서 극동민족대표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바로 이 조선노동대회 대표의 위임장을 받아 길을 떠난 것이다. 당초 이르쿠츠크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계획이 바뀐 끝에 1922년 1월 7일 모스크바에서 회의가 개최되었다. 참석자는 모두 회의에 자신이 속한 단체의 위임장과 ‘조사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회의에 참석하는 ‘목적과 희망’을 적는 항목에 “조선의 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이라고 기재하였다. 이는 ‘조선 독립’을 최고 가치이자 목표로 삼았음을 말해준다. 조사표에 직업을 ‘공업’이라 적고, 이력서에는 ‘방직공’이라 썼는데, 이는 경성공업전습소 염직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난 뒤 다른 대표들과 달리 바로 귀국하지 않고 1년쯤 러시아에 머물렀다. 치타에서 사회주의를 학습하다가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로 가서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 참석하여 이르쿠츠크파에 가입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또 1922년 12월 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곧 꼬르뷰로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다. 이것은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계획이 아니라, 코민테른이 국내 각 사회주의 그룹을 통합하여 조선공산당을 건립한다는 계획 아래 만들어진 조직이다. 이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꼬르뷰로에 참가하고, 해삼위(海蔘威) 지역 청년회 대표가 되었다.

 

1923년 3월 조선공산당 조직 임무를 띠고 귀국하였다. 5월 신철(辛鐵)과 함께 꼬르뷰로 내지부를 건설하고, 8월부터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당 건설 토대를 다지는 데 힘을 쏟았다. 같은 시기에 신사상연구회를 만들어 낙원동 173번지 파고다공원 동문 앞에 회관을 마련하였다. 이 단체는 이름 그대로 ‘신사상’, 즉 “새로 수입되고 있던 코뮤니즘의 연구가 그 목적”이었다. 다음으로 1924년 2월에 무산자청년회와 토요회를 결합하여 신흥청년동맹으로 발전시켰다. 이는 내지부의 강력한 경쟁 세력인 서울콤그룹 휘하의 서울청년회에 대응하는 단체였다. 또 1924년 4월 노동단체와 소작단체를 합하여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조직하고, 청년단체도 정리하여 조선청년총동맹을 결성하였다.

 

마침 양대 세력 가운데 하나인 서울콤그룹이 내지부를 해산한다면 통합에 응한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그러자 1924년 3월경 내지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서 당 건설의 근간이 될 조직을 만들었으니, ‘13인회’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내지부·북성회파·상해파·서울콤그룹 등의 대표자들이 모두 참가하였다. ‘13인회’의 정식 명칭은 ‘조선공산당창립준비위원회’였다. 서울콤그룹을 이끌던 김사국(金思國)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오르그뷰로와 관계없이 당을 결성한 뒤 코민테른에 가입하자고 주장하자, 이에 대하여 내지부 계열과 상해파는 국내외를 가리지 말고 하나의 역량으로 결집하며,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당을 창립하자고 주장하였다. 견해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1924년 9월 핵심 인물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왕성하게 활동하던 1924년에 한 해 남짓 『조선일보』 기자로 지내다 10월 7일 종로경찰서에 붙잡힌 적도 있다.

 

13인회가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1924년 11월 19일 이준태·김찬(金燦) 등과 함께 신사상연구회를 발전시켜 화요회를 결성하였다. 화요회는 전국적인 기초 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고향 안동에도 김남수(金南洙)가 나서서 1925년 1월에 화요회 안동지회 성격을 가진 화성회를 조직하였다. 또 같은 1월에 잡지를 발간하여 계몽과 세력 확장을 꾀하고자 화화사(火花社)를 설립하고 사상운동 잡지 『불꽃(火花)』 발간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새로운 지원세력이 필요하자, 1924년 4월 풍산소작인회 대표로 권오설(權五卨)을 불러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을 맡겼다. 그리고서 마침내 화요회를 바탕으로 당 건설에 나섰다.

 

1925년 4월 17일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창당 대회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열렸다. 12명이 오후 1시에 황금정(黃金町) 1정목(一丁目) 중국요리점 아서원(雅叙園)에 모여 조선공산당을 창당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중앙집행위원이 되고, 이튿날 열린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비서부 책임자, 곧 초대 책임비서가 되었다. 한편 조선공산당 창당에 맞추어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되었다.

 

창당 직후 7월 21일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가 8월 6일에 풀려났지만, 당 조직 내용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아 경찰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이 무렵 경북 예천에서 ‘형평사 피습사건’이 발생하자 사건 진상을 조사하고 희생자를 위문하며, 내용을 대중에게 알리는 실천위원이 되어 활약하였다.

 

조선공산당은 국내외로 발전해 나갔다. 그런데 1925년 12월 ‘신의주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공산당의 존재가 드러나는 위기가 닥쳤다. 이에 강달영(姜達永)과 이준태를 중심으로 당 중앙을 재구성 하자마자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신의주에서 기나긴 신문 과정과 옥고를 치렀다. 1926년 2월부터 신의주지방법원 신문으로 이어졌다. 1926년 6월 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뒤 7월에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이른바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사건’에 연루된 인물들과 연계되어 조사를 받았다.

 

길게 끌던 예심이 1927년 3월 31일에 끝났지만, 판결은 해를 넘겨 1928년 2월 13일에 났으니 6년형이었다. 1931년 11월 풀려날 때까지 7년 대부분을 독방살이로 보냈다. 출옥할 때 모습을 담은 신문보도에는 독방살이에 대한 회고와 더불어 건강이 극히 좋지 않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출옥한 직후 모친상을 당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10년 동안 집안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부친과 동생들, 제수 등 가족들이 연달아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감옥에서 나온 뒤 잠시 기운을 차리고서 1937년 8월부터 금강산 유람에 나선 일이 있다. 여행길에 지은 시 11편을 담아 9월 14일자로 『동해안주공소첩(東海岸走笻小帖)』 을 묶어낸 것이 오늘까지 전해진다. 만 53세가 되던 1944년 3월 22일 (음)2월 28일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재봉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판형1]

 

⋮김희곤⋮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1. 6. 2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 姜德相, 『現代史資料』 29, 東京: みすす書房, 1972 ; 『동아일보』, 1925. 2. 2, 4. 15, 1927. 9. 13, 1928. 1. 7·11·13·19·26, 2. 14, 3. 7 ; 『매일신보』, 1927. 9. 13·16 ; 『조선일보』, 1925. 2. 1·2·18, 1927. 2. 24, 3. 11, 4. 2·3, 9. 6~29, 10. 10·12·14·16·19·21·28, 12. 10·16, 1928. 2. 13~2. 14, 1931. 11. 18 ; 송상도, 『기려수필』, 195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10권, 1978 ; 김희곤,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 경인문화사, 2006 ; 김희곤, 『경북을 독립운동의 성지로 만든 사람들』, 선인, 2015.
  • 김재봉 프로필사진
  • 김재봉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뒷면(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김재봉_profile
  • 김재봉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