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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재룡 金在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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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재룡
한자명 金在龍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라남도 곡성(谷城)
생몰년월일 1907. 2. 11 ~ 1937. 1. 3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광주농업학교, 사회과학연구회, 옥과노동회, 전남노농협의회
관련 사건 성진회사건, 전남노농협의회사건
주요 활동 1927년 사회과학연구회 조직, 1928년 광주농업학교 동맹휴학 주도, 1929년 광주농업학교 만세시위 주도, 1932년 옥과노동회·전남노농협의회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909년 2월 11일 전라남도 곡성군(谷城郡) 입면(立面) 입석리(立石里)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주소는 전남 광주 부림면(府林面)이었다. 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 재학 중 1927년 11월 문승수(文升洙)의 권유로 광주 누문동 김태호(金台鎬)의 집에서 김복만(金福萬)·유상걸(柳上杰)·정동수(鄭東秀)·주경석(朱庚錫)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사회과학연구회(社會科學硏究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6월 27일 평소 불만을 갖고 있던 일본인 교사 모리오카(盛岡)에게 사직을 권유하는 한편 히라노(平野) 교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반응이 없자, 이틀 뒤인 6월 29일 김태식(金台植)·송성수(宋聖秀)·유상걸 등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학교측이 주도자 12명에게 퇴학, 102명에게 무기정학, 나머지 학생들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자 이들은 동원부·연락부·정탐부·모계부(謀計部) 등을 조직하여 학교측의 동정을 살피고,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 일한 공학제(共學制) 실시 반대’ 등의 내용을 담은 격문을 제작·살포하며 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이로 인해 경찰에 붙잡혀 1928년 9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른바 ‘성진회사건(醒進會事件)’으로 다시 붙잡혀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2년 1월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서 정동화(鄭東華)·한명덕(韓明德)과 함께 농민단체인 옥과노동회(玉果勞動會)에서 활동했으며, 5월 ‘전남노농협의회사건(全南勞農協議會事件)’으로 또다시 붙잡혀 1934년 11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규무⋮

|참고문헌|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28. 9. 28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31. 6. 13 ;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34. 11. 27 ; 『동아일보』, 1930. 10. 22, 1932. 7. 27 ; 『중외일보』, 1928. 7. 15, 10. 3 ; 『매일신보』, 1930. 10. 22, 1931. 6. 15 ; 장규식, 『1920년대 학생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한규무, 『광주학생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김성민, 『광주학생운동』, 역사공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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