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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인수 金仁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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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인수
한자명 金仁秀
본 관  
이 명 김경태(金景泰, 金敬泰)
출신지 경상북도 영일(迎日)
생몰년월일 1898. 2. 2 ~ 1939. 7. 28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법정사 항일 시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8)

1898년 2월 2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동해면(東海面) 도구리(都邱里, 현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경태(金景泰 또는 金敬泰)를 사용하였다.

 

1914년 경북 영일군 출신인 김연일(金連日)이 신흥 종교인 태을교(太乙敎)의 지도자로서 제주도에 들어갈 때, 그의 조카로서 동행하였다. 1918년 4월부터 김연일을 비롯하여 제주도로 들어온 정구용(鄭龜龍)·장임호(張林虎)·김용충(金用忠)·김삼만(金三萬)·강민수(姜敏洙) 등과 함께 항일 무력 항쟁을 도모하였다. 8월 초에는 선도교(仙道敎) 지도자인 박주석(朴周錫)에게 법정사 비밀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하였다. 선도교와 태을교는 모두 강일순(姜一淳)을 교조로 모시는 신흥 종교였다.

 

항일 무력 항쟁은 1918년 10월 4일부터 시작되었고, 10월 7일 새벽 법정사에 집결한 선봉대 33명은 서귀포 방면으로 무력 항쟁을 개시하였다. 이때 김연일, 김용충과 함께 법정사에 남았다. 선봉대는 도순리(道順里)·영남리(瀛南里)·서호리(西好里)·호근리(好近里)를 돌며 대오를 꾸렸다. 항쟁 대오를 이끌던 박주석과 강창규는 서귀포 습격을 중지하고 중문리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기로 전술을 바꾸었다. 중문리(中文里)로 향하던 중 강정리(江汀里)와 도순리 사이에 있는 대천(大川) 연변에서 서귀포부터 제주성을 잇는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다. 하원리(河源里)에 이르자 항쟁 참가 인원은 400여 명에 달하였다.

 

중문리에 이르러서는 경찰주재소장인 요시하라(吉原)를 비롯한 경찰 3명을 포박한 뒤 경찰주재소에 갇혀있던 13명을 풀어주었고, 주재소 건물을 불태웠다. 오전 11시 서귀포 경찰주재소 기마 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해 오면서 항쟁 대오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법정사 항일 시위로 66명이 붙잡혀 31명이 실형을 받았고, 2명은 재판 받기 전에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직전에 일어난 법정사 항일 시위는 많은 구속자를 남기며 일제 하 제주도의 항일운동을 대표하는 무력 항쟁이었다.

 

무력 항쟁이 좌절되자 피신했으나 결국 11월 1일에 붙잡혀 구속되었다. 1919년 3월 1일 재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참고문헌|

「정구용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23. 6. 29 ; 「형사사건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 국, 1918 ; 「수형인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1918 ;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1, 東京:原書房, 1967 ; 박찬식, 「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성격」, 『제주도연구』 22, 2002 ; 한금순,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 『대각사상』 9집, 2006 ; 김광식, 「법정사 항일운동의 불교사적 의의」,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9, 2009 ; 한금순, 「1918년 제주도 법정사 항일운동 관련 『형사사건부』 분석」, 『대각사상』 1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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