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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학규 金學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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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학규
한자명 金學奎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호 : 백파(白波), 동이(東耳)
출신지 평안남도 평원(平原)
생몰년월일 1900. 11. 24 ~ 1967. 9. 20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조선혁명군, 조선혁명당,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신흥무관학교 졸업, 1929년 이후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대일전투 수행, 1934년 민족혁명당·조선혁명당 활동,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1942년 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독립장(1962)

1900년 11월 24일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서해면(西海面) 사산리(蛇山里)에서 의사인 부친 김기섭(金基燮)의 4남 2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백파(白波), 동이(東耳)이다.

 

5세가 되던 1905년 부친이 사망하여 고향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10년 국권 침탈에 즈음하여 대한제국 군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동향인 이갑(李甲)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12월 만주 퉁화현(通化縣) 이밀(二密)이라는 황무지 산골에 정착하여 산지를 개간하고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 무렵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1919년 신흥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한 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한국의용대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가을 일제가 자행한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으로 많은 한인들이 학살될 때, 형제와 처남도 살해되는 일을 겪었다. 구사일생으로 피신·도피하던 중 남만주 신민현(新民縣)에서 영국인 목사 오멜브나(Omelvena)의 보호를 받았다. 영국 목사가 경영하는 중국학교인 문회고급학교(文會高級學校)에 들어가 6년 동안 신학문을 배웠다. 뒤에 충칭(重京) 국제방송국에서 유창한 중국어로 수행한 명연설은 이때 연마한 중국어 덕분이었다. 1927년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浦)에 있던 교민학교인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에서 동포 학생들을 가르치며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1929년 겨울 동명중학교를 떠나 국민부의 중앙 소재지인 싱징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에서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國民府)에 들어갔다. 국민부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일종의 행정부로서, 그 해 12월 조선혁명당을 창당하고, 당군으로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였다. 국민부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장군의 참모장으로 대일항전을 펼쳤다.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싱징현 전투, 퉁화현 콰이다마오 전투, 장덴즈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무렵 독립운동 동지인 오광심(吳光心)과 결혼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당시 중동철로를 호위하던 중국의 마잔산(馬占山)을 비롯한 왕더린(王德林)·수빙원(蘇炳文)·탕쥐우(唐聚五) 등이 동북의용군·구국군·민중자위군의 이름으로 반일투쟁의 깃발을 들었다. 특히 탕쥐우는 1932년 4월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에서 자위군을 규합하였다. 이때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서, 4월 탕쥐우군 사령부에 가서 탕쥐우와 만났다. 면담 결과, 양측이 긴밀한 군사관계 유지와 한중연합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펼치기로 결의하고 대일 작전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0월 중순까지 한중연합군은 영릉가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려 조선혁명군의 이름이 만주 전역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32년 11월 일본군의 공세에 밀린 중국 항일부대들은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였으나,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만주에 남아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1933년 중반 무렵 조선혁명당은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통제하고 주요 정책을 결정하며 기능 수행을 감독하는 형태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때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외교담당 책임자, 자치위원회 위원 등으로 선임되었다. 이즈음 난징(南京)에 있던 김구가 장제스와 협의하여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 있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안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김구는 만주로 연락원을 보내서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등 독립군이 관내지역으로 옮겨오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의 일부 장령들은 1933년 말 만주에서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조선혁명군 사령부는 관내지역 독립운동세력의 도움을 받아 만주를 지키며 항전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부족한 인력·물자를 보충받기 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원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때 임시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조선혁명당 및 군의 대표로서 선발되어 난징에 파견되었다.

 

1934년 5월 부인 오광심과 함께 농부로 변장하여 안둥-칭다오-톈진-베이징을 거쳐 난징에 도착하였다. 난징에서 김규식·유동열·최동오·성주식·김원봉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 지도급 인사들에게 만주 조선혁명군의 대일작전 상황을 보고하고, 인력·물력 보급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당시 관내지역에서는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모여 통합을 전제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고 있었다. 조선혁명당 대표 최동오·유동열도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기에 그 역시 통일동맹의 조직부 책임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조직부 책임자가 된 뒤 먼저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선결과제임을 깨닫고 난징의 통일회의 상황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아내로 하여금 암송케 한 다음 난징을 출발시켜 조선혁명당 본부에 보고하게 하였다. 보고를 받은 조선혁명당 본부에서는 그가 제안한 보고서 내용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한편, 그를 난징 통일회의의 조선혁명당 대표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1935년 봄부터 난징 통일회의에 정식으로 참가하였다. 난징 통일회의에는 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조선혁명당 등 5개 단체 대표가 참석하였는데, 최동오와 함께 조선혁명당 대표로 참석하였다. 1935년 7월 단일대당 창립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었다. 이때 김원봉·김두봉·최동오·신익희·윤기섭·윤세주·조소앙·진의로·지청천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만주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대동단결에 힘을 기울였다.

 

1936년 1월 군사교리 연구와 군사학 습득을 위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루산특별훈련반(廬山特別訓練班)에 들어가 1년간 군사훈련을 받고 난징에 돌아왔다. 이즈음 민족혁명당은 독립운동방략과 이념 등의 차이로 말미암아 조소앙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계열 인사들이 이탈하여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잇달아 신한독립당 출신 조성환·홍진도 이탈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혁명당을 재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만주의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고이허(高而虛)와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의 전사했고, 일본군의 이른바 ‘토벌작전’ 등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정황도 작용하였다. 민족혁명당에서 탈퇴한 인사들과 논의하여 1937년 4월 하순 난징에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고, 이청천·최동오·유동열·양기탁·현익철·강창제 등과 함께 집행위원이 되었다.

 

1937년 7월 일본군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조선혁명당은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등과 연합하여 임시정부 외곽단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혁명당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중령(中領)(중국지역)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어 임시정부가 전시체제 대비와 적극적 군사활동 추진을 위해 군무부 아래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국무회의에서는 7월 15일 유동열·이청천·이복원·현익철·안공근 등과 함께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에 직접 참여하여 독립전쟁 계획안 작성, 군사 인재 양성, 군사 관련 서적 연구와 편찬에 몰두하였다.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기 직전 중국국민당 정부가 충칭으로 옮겨갔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도 11월 말 장강을 거슬러 한커우(漢口)를 거쳐 창사(長沙)로 이동하였다. 임시정부와 이동하면서도 광복군 조직에 대한 연구, 군사학 편찬 사업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중국 각지 점령에 따라 임시정부와 함께 1938년 7월 광저우(廣州)를 거쳐 류저우(柳州)로 이동하였고, 1939년 봄에는 충칭 바로 아래 치장(綦江)에 도착하였다. 동년 가을 치장에서는 민족주의 우파세력과 좌파세력 등 7당 대표가 모여 통일운동을 꾀하였으나 무산되었다.

 

민족주의 우파 세력인 조선혁명당을 비롯한 3당은 1940년 5월 충칭에서 통일 신당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를 보위하는 여당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동시에 한국광복군 창설 계획을 다시 추진하였다.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구를 선임하고,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자, 주로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사무와 선전사업을 펼쳤다. 같은 해 11월 광복군총사령부가 전선과 가까운 시안(西安)으로 옮겼으나, 총사령과 참모장은 중국 정부와 군에 관한 사무 협의차 충칭에 머물렀다. 이때 참모장 대리로 임명되어 시안으로 파견되었다. 시안 얼푸지(二府街)에 사령부를 설치한 뒤, 적후방 공작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어 총사령부 예하에 5개 지대가 편성되자, 제2지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제2지대장 겸 참모장으로 복무하다, 조선의용대가 신설 제1지대로 편제되자 1941년 7월 신설 제2지대장을 이범석에게 인계하였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군무부로부터 시안보다 전선에 더 가까운 산둥반도로 가서 초모공작을 할 것을 지시받았다. 일행과 함께 시안을 출발하였으나 전세로 인해 중간 지점인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정착하여 한인 청년을 확보하는 초모공작에 나섰다. 1944년 탕은버(湯恩伯) 장군이 운영하는 린촨(臨泉) 소재 중국1전구 군사간부훈련분단 안에 한국광복군훈련반을 설치하였다. 10월 제1기생 51명을 광복군으로 길러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충칭 총사령부로 가기도 하고, 다시 시안으로 이동하여 제2지대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어서 제2기와 3기는 푸양에서 훈련하였다. 1945년 6월 30일 한국광복군 제3지대를 편성하고 지대장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에 파견된 미국 공군 및 정보기관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적후방에서 수집한 정보를 린촨에 있던 미국 제14항공대 소속 버취(J. M. Birch) 대위에게 알려 주었다. 1945년 5월 버취 대위와 함께 쿤밍에 가서 제14항공대 사령관 센놀트(C. L. Chennault) 장군을 면담하고 그곳에서 1주일간 머무르면서 공작연락에 관하여 OSS 요원들과 회합하였다. 그 결과 시안 제2지대와 마찬가지로 OSS와 국내 진공에 필요한 인력을 길러내는 데 합의하고, 안후이성 리황(立煌)에 훈련반을 두고 무전기술 교육에 나섰다. 1개월간의 훈련이 진행되던 중 일제가 항복하였다. 1945년 임시정부 군무부의 보고에 의하면, 제1기 한광반 졸업생으로 51명이 산출되었고, 그때 푸양에 50여 명이 주둔하고 있는 외에 국내외 각지에 50여 명의 대원들이 조직·선전·초모 등 공작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푸양의 김학규 부대의 초모 성적이 가장 우수하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 광복군 주상하이 판사처 처장에 임명되어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으며 3만여 명의 교포를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1946년 9월 한국독립당 만주특별당 부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4월 조국 땅을 밟았으나 남북 분단으로 불운한 여생을 보내야 하였다. 1949년 6월 김구암살사건에 얽혀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등 불운한 말년을 보내다 1967년 9월 2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개회를 선포하는 김구와 옆에 선 김학규(1940. 9. 17) [판형1]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1940. 12. 26) [판형1]

 

한국광복군 제3지대 본부유채에서 김학규와 대원들(1945) [판형1]

 

 

 

⋮김광재⋮

|참고문헌|

『독립신문』 ; 『광복』 ; 『한민』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東京: 原書房, 1967 ; 추헌수, 『자료 한국독립운동』 1, 연세대 출판부, 1971 ;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21, 2005~2007 ;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 김학규, 「백파자서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
  • 김학규 프로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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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개회를 선포하는 김구와 옆에 선 김학규(1940. 9. 17)
  •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1940. 12. 26)
  • 한국광복군 제3지대 본부유채에서 김학규와 대원들(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