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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태규 金泰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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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태규
한자명 金泰奎
본 관  
이 명 김태규(金泰圭)
출신지 충청북도 영동(永同)
생몰년월일 1895. 5. 4 ~ 1974. 8. 10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영동군 영동면 만세운동
주요 활동 1919년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면 장터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2)

1895년 5월 4일 충북 영동군(永同郡) 영동면(永同面)(현 영동읍) 주곡리(主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영동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영동면은 영동군의 중심지역이며, 영동장터는 인근의 다른 지역에서도 장꾼들이 모이는 곳이였기에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주변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영동장터의 장날인 1919년 3월 25일 시장 남쪽의 영동교(永同橋) 다리 위에 사방 1.3m 크기의 대형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그리고 면내 여러 곳에 종이로 만든 150여 장의 태극기가 배포되었으나, 실제 만세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영동면의 본격적인 만세시위는 주곡리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주곡리에서는 1919년 3월 1일 마을 주민들이 모여 ‘광무황제추모제례(光武皇帝追慕祭禮)’를 봉행하였다. 추모 제례 이후 울분을 삭이던 중,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3월 25일에는 면소재지에 태극기가 게양되는 것을 보고 만세시위를 일으킬 결의를 하였다. 이에 마을에서 뜻이 맞는 동년배들인 한의교(韓義敎)·한광교(韓光敎)·박성하(朴聖夏)·정성백(鄭聖白)·장인덕(張仁德)·정우문(鄭友文)과 논의하여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영동장터의 장날인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 때 배포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거사일인 4월 4일 한의교·한광교·박성하·정성백·장인덕·정우문과 함께 장사꾼 차림으로 장터로 나가 박명월(朴明月)의 주막에 모였다. 만세시위에 나서기 전 각오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이들의 진지한 태도를 보고 짐 속에 태극기가 숨겨진 것을 짐작한 주모 박명월은 이들에게 술상을 마련해 주었다. 상을 물리고 나서 오후 2시경 장터의 위 아래로 흩어져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면서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장터에 나온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대 규모는 2,000여 명에 이르렀다. 한의교, 한광교 등과 시위대를 지휘하여 읍내 곳곳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해산을 강요하는 일제 경찰에 맞서 몽둥이를 들고 대항하며 더욱 격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제 경찰은 시위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으로 대응하였다. 이 과정에서 6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나오면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때 한의교·한광교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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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형사사건부」 ;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 삼일운동편』 其一,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영동군지편찬위원회, 『영동군지』 상·하, 충북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2004 ; 김진호, 「충북의 3·1운동」, 『역사와담론』 68,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