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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재형 金在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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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재형
한자명 金在衡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출신지 충청북도 청주(淸州)
생몰년월일 1890. 1. 8 ~ 1966. 5. 30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연기군 조치원면 만세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30일 연기군 조치원면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90년 1월 8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현 청주시) 강내면(江內面) 궁현리(弓峴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충청남도 연기군(燕岐郡) 북면(北面, 현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조치원리(鳥致院里)로 이주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기독교를 믿었고, 『매일신보』 조치원 지국장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맹의섭(孟義燮)·이은식(李殷植)·전병수(全炳壽) 등과 조치원청년단(鳥致院靑年團)의 일원으로 서울에 올라와 있던 중, 3월 1일 서울 시내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목격하였다. 이에 공감하여 동참하였고, 귀향해서 조치원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고 다른 지역에도 전파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박동완(朴東完)을 만나 「독립선언서」 500매를 받았다.

 

귀향 후 거사 시기를 모색하던 중 3월 23일부터 고향인 충북 청주군 강내면에서 횃불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숨겨 놓았던 독립선언서 500매 중 350매를 같은 마을의 김재석(金在石)에게 주어 청주군 내의 문의면(文義面)과 미원면(米院面)·보은군(報恩郡) 보은읍 등지에 배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나머지 150매는 50매씩 강내면의 조동식·김봉회(金鳳會)·박준평(朴準平) 등에게 전달하여 배포시켰다.

 

동시에 서울에 함께 갔던 조치원청년단의 맹의섭·이은식·전병수·김규필(金奎弼)·천종구(千種九) 등과 조치원시장 장날인 3월 30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지역 사회의 추앙을 받던 홍일섭(洪日燮)을 만세시위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3월 30일 오후 2시 경부터 홍일섭의 ‘독립 만세’ 선창을 시작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시장 곳곳을 행진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조치원헌병분견소의 헌병들이 출동하여 만세시위를 진압하였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 “독립선언문을 배포하여 군중을 선동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치안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붙잡혔다. 1919년 4월 1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5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전병수를 비롯하여 청주군 강내면 다락리(多樂里)의 이석영(李錫永) 등과 함께 청주군 강서면에 정명학숙(正明學熟)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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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판결문」,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1919. 4. 19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 5. 10 ; 「판결문」, 고등법원, 1919. 6. 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8권,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 청주시, 『청주시지』 상, 미진문화사, 1997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운동Ⅱ- 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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